▲깊은 산간지역이 아닌 서울에도 대장간을 뜻하는 지명이 의외로 많다. 서울 중구의 '풀무재'에는 조선 후기까지도 대장간들이 몰려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무척 많았다고 한다.
국토지리정보원
깊은 산간지역이 아닌 서울에도 대장간을 뜻하는 지명이 의외로 많다. 서울 중구의 '풀무재'. 서울 중구청에 따르면 풀무재는 한자로 '야현(冶峴)'이라 하고, 중구 묵정동에서 쌍림동을 거쳐 충무로 5가 충무초등학교 북쪽에 있었던 고개다. 대장고개라 부르기도 했다. 야현은 장충동 2가, 묵정동, 충무로 5가 일대의 옛 이름인 야현동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풀무재 일대에는 조선 후기까지도 대장간들이 몰려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무척 많았다고 한다. 서울지하철 2호선 공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대장간이 수십 곳은 자리하고 있었는데, 1990년대 이후 도시화에 밀려 사라졌다고 한다.
서울에는 산간지방에나 있을 법한 '풀뭇골'이라는 지명도 있다. 숭례문에서 소의문 사이 성곽 바깥쪽이 풀뭇골이다. 한자로 '야동(冶洞)'이라 했다. 역시 대장간 마을이란 의미다.
흔히들 반송방(盤松坊) 야동이라 하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 기행문 <열하일기>로 잘 알려진 조선 최고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이 태어난 곳이다. 연암은 할아버지 박필균(1685~1760)의 집에서 나고 자랐는데, 할아버지 집이 반송방 야동에 있었다. 반송방은 온갖 가게들이 즐비하고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 늘 붐비는 곳이었다.
연암은 자신이 양반 가문이면서도 양반사회를 풍자하는 소설을 여럿 썼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양반전>이나 <호질(虎叱)>, <광문전(廣文傳)> 등과 같이 양반과 일반 백성, 특히 하층민의 생활 저변과 그 심리까지 자세히 그릴 수 있었던 데에는 연암이 반송방 야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게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연암이 네 살 때 할아버지가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했다. 할아버지가 근무하는 경기감영이 반송방에 있었다. 그 경기감영과 주변 모습을 그린 <경기감영도>가 12첩 병풍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으로 반송방 일대의 골목골목과 거리의 번화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미술사학자인 박정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펴낸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에 따르면, <경기감영도>는 1768년에서 1895년 사이에 그려졌다. 연암의 나이로 보면 할아버지 박필균이 경기도관찰사를 맡았을 때의 그림은 아니다. 연암이 30대 이후에 그려진 반송방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가 어릴 때와 큰 차이는 없었을 게다.
돋보기로 확대해서 봐야 하기는 하지만, <경기감영도>에는 일반 백성들의 일상이 그대로 묻어난다. 쌀이나 짚신, 빗자루 등을 파는 가게가 길가에 늘어서 있고, '만병회춘(萬病回春)'이나 '신설약국(新設藥局)'이라고 벽에 써 붙인 약방도 있다. 길거리에는 관찰사 행차를 지켜보려는 구경꾼들이 몰렸으며 땔감 장수, 지게꾼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목판에 엿을 파는 아이들도 있다. 연암은 어릴 적부터 반송방 골목골목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들여다보았을 게 분명하다.
전쟁의 역사적 장소와 관련있는 '쇠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