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표지(출처 미확인)
남의 땅을 분단하는 선을 당사자에게 단 한 마디도 없이 찌익 긋고는 분계 표지를 당당하게 설치했다. 이렇게 점령군들이 합동으로 설치한 실물 표지 앞에서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하는 토론이나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말로는 해방군으로 왔다고 해도 엄연한 점령군이다. 38선 표지가 설치되면서 미군과 소련군의 초소가 각각 세워졌을 것이다. 남북의 통행이 당장 차단된 것은 아니지만, 38선으로 남과 북이 구분된다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다니던 길이 이제 외국군의 검문을 받아야 통과하는 지점으로 바뀐 것이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영국 총리 처칠,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는 전쟁이 끝나면 조선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합의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잘 알려진 대로 '적절한 시기'에 독립하는 것으로 합의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했다. 이와 함께 어느 한 국가에 의한 군사적 점령은 강한 정치적 반발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조선에 중앙집권제 방식의 군정청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뒤에 열린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두 나라는 이미 조선의 독립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이 아니었을까.
1945년 8월 6, 9일 일본에 원자탄이 잇달아 투하되고, 8월 9일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는 바로 만주로 들이닥쳤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일본은 8월 10일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연합국 측에 전달했다. 연합국의 예상에 견주자면 돌발적인 사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미국은 한반도의 일본군에 대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미군과 소련군이 무장해제를 하는 방안을 서둘러 제시했고 소련이 바로 동의하여 확정되었다. 실제로 지도 위에 38선을 처음 그은 인물은 당시 미국 전쟁성(국방부)에서 일하던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중령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월 7일에는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는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를 자신의 권한으로 시행하며,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나 질서를 교란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인들의 희망과는 달리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란 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미군이 서울에 들어온 9월 9일, 진주군 사령관 하지는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로부터 항복을 접수했고, 총독부 청사에는 오후 4시 반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이로서 미국의 군정 3년이 시작되었다.
소련군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김원봉이 주도하여 창설한 조선의용대는 지휘부와 본대가 따로 움직였다. 본대는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타이항산의 팔로군과 합작하면서 만주 방면으로 촉수를 뻗고 있었다. 일제가 항복하자 조선의용군 독립지대가 선양에서 조직됐다. 얼마 후 관내에서 이동해온 조선의용군 선견대와 합병해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로 개편했다. 이들은 선양에서 안동을 거쳐 압록강 다리를 건너 군악대를 앞세우고 신의주로 들어갔다.
그러나 소련군 사령부에서는 포츠담회담의 미영소 합의에 반한다는 이유로 이 부대를 해산하려고 했다. 해산이란 무기를 빼앗기고 조직행동을 금지당하는 것이다. 무장대오에게는 사형선고이고, 이에 불응하면 무력으로 진압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해산을 거부했다. 안동으로 회군하고 11월에는 선양에 도착했다. 1945년 11월 의용군 대원들이 선양에 집결했으나 소련은 이 부대의 북한으로의 진입을 불허했다. 말로는 해방군이라 외치지만 실제 행동은 점령군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