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왼쪽)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위키미디어 공용
17~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찬양한 인간의 본질은 단연 '이성'이다. 멀리는 고대 그리스 시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해, 16세기 프랑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18세기 독일 칸트의 관념론에 이르기까지 이성의 역사는 실로 장구하다.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고, 그 이성 때문에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유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간본질론이다.
18세기에 등장한 주류경제학은 이성주의에 발을 딛고 있는데, 이성주의는 거기서 '경제주의'의 옷을 입는다. 가령, 손익을 완벽하게 계산해 낼 수 있는 이성의 계산능력은 시장을 안정과 조화에 이르게 하는 주류경제학의 주체적 조건이다. 계산적이면 이성적이고, 계산능력이야말로 이성의 힘이다. 이 엄밀한 계산과정에 감정의 개입은 금물이다. 감정은 계산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억제되어야 한다. 나아가 감정은 주류경제학의 '과학화'도 방해한다. 주류경제학 모델에서 감정은 추방하고 무찔러야 할 적이다.
그러나 주류경제학을 철저한 감정혐오주의자로 착각하면 안 된다. 그것이 모든 감정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감정은 대략 '선한' 감정과 '악한' 감정으로 구분될 수 있겠다. 선한 감정은 보통 연대, 협력, 신뢰, 사랑 등으로 표현되는데,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은 '이타주의'로 불린다, 반대로 악한 감정은 배제, 경쟁, 기회주의, 혐오의 모양을 띠는데, 이것들은 보통 '이기주의'를 낳는다.
선한 감정과 이타심은 '미덕'의 바탕이 되고 악한 감정과 이기심은 '악덕'을 이룬다. 버나드 맨더빌과 애덤 스미스가 각각 <꿀벌의 우화>와 <국부론>에서 명백히 선언한 바와 같이 주류경제학은 이런 악덕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제학이다. 얼마나 악덕을 찬양했으면, 당시 사람들이 '맨더빌'(Mandeville)을 '인간악마'(Man-devil)로 불렀을까?
주류경제학이 이성을 숭상한 나머지 감정을 혐오한다고 했지만, 이처럼 실제론 모든 감정을 혐오한 건 아니다. 그들은 선한 감정만 추방했을 뿐 악한 감정은 모델 안에 그대로 유지했다. 이런 악덕의 경제학은 냉정함과 경쟁심, 그리하여 공격적 태도를 인간 본성의 결과로 여기며 권장한다. '일베'가 가장 희열을 느끼며 환호하는 행동 방식이다.
선한 감정도 인간의 본질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성적이기만 한가? 계몽사상가들의 융단폭격 아래서 잠시 잊고 있지만, 또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17세기 후반 파스칼과 19세기 초 쇼펜하우어는 이미 각각 "가슴"과 "충동의지"를 인간의 진정한 면모로 내세운 바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연민과 동정심이라는 보살핌의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18세기 중반 루소의 '성선설'을 모르는 이가 없다.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이런 인간론은 비주류경제학에 닻을 내렸다. 케인스에 의하면 기업은 미래에 벌어들일 예상 손익을 완벽히 계산한 후 투자하지 않는다. 모든 기업은 어림짐작한 후 과감히 지른다. 그리고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 투자를 추동했다. 다윈주의자 베블런에 따르면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이성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더욱이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수백만 년의 집단생활과 집단 간 경쟁에서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어버이 성향"(parental bent)이 선택되었다. 어버이 성향이 낳은 연대, 포용, 이타심 등 '따뜻한 감정'이 진화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일찌감치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케인스와 베블런은 자본주의경제가 인간을 살리려면 강력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함을 역설한 경제학자들이다. 이들 경제학자의 눈에도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이었으며, 사회를 발전시키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악한 감정이 아니라 선한 감정이었다.
어쩌면 삶 대부분에서 우리는 냉정한 이성보다 사랑하거나 미워하며, 연대하거나 싸우며, 다정하거나 공격적이며,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곧, 감정이 인간의 본질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미워하며 싸우고 공격하기보다 사랑하며 연대하고 다정스럽게 살아간다. 물론 지배하고 쌓아놓기 좋아하는 한 줌 '욕망의 전사'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선한 감정이 없었더라면 서구의 복지국가는 건설될 수 없었으며, 선진국(!)들은 다시 가난해지거나 도태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