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경제체제 건설을 위해 싸워 보는 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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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수(eroika)등록 2023.03.19 18:58
 노동자와 서민에게 대가와 고통을 전가하는 자본주의 
 최근 실리콘밸리은행과 시그니처은행의 위기가 세계 9위 규모의 투자은행 크레디트 스위스로 확산되면서 경기침체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 경제는 팽창과 위기 그리고 수축을 되풀이한다. 그 속에서 대가를 치르면서 고통을 겪는 이들은 늘 노동자와 서민들이다. 자본주의는 코로나19 보건 위기의 끔찍한 재앙과 이에 동반된 경제 위기의 지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에 인플레이션이라는 비싼 청구서를 민중에게 내밀면서 시름하게 만들더니 더욱 절망의 늪에 빠뜨리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기후위기까지 이윤 획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기후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이러한 위기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경제체제를 창조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주장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개선은 고통과 문제를 조금은 완화해주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모순과 고통을 없애지는 못하며, 정권을 잡은 정치세력이 보수세력이냐 자유주의 세력이냐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냐에 따라, 그리고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력에 따라 개선과 악화 사이를 진동할 뿐이기 때문이다. 혁명을 목표를 하지 않는 제도의 개선이란 자본주의 체제의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임을 역사가 증명해왔다.   
 

금융 위기 이미지 ⓒ pixabay

 


 자본주의 모순 해결의 해법은 새로운 사회경제체제 건설 
 새로운 사회경제체제를 창조한다는 것은 사회경제체제의 본질인 사회적 관계를 새로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는 생산수단인 자본(기업)을 소유한 자본가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가 맺는 자본관계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본을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관계로 바꾸는 것이 새로운 사회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 된다. 누구는 그런 사회가 소련 사회주의 체제 아니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경제학의 대결』(연암서가, 2020)의 스티븐 레스닉과 리처드 울프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현실 사회주의는 국가가 생산수단(기업)의 소유권을 가졌고, 국가 관료(각료회의)가 노동자들이 생산한 생산물 가운데 잉여 생산물에 대한 전유와 분배 권한을 가지면서, 소련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자본주의 기업을 기업 이사회와 같은 각료회의가 경영하면서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운영하던 국가 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유럽을 향해서』(한울엠플러스, 2017)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 굴리엘모 카르케디는 소련 사회주의 체제는 "순수한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가고 있던 거짓된 체제"였으며, 따라서 "소련 사회체제의 몰락 원인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며,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맹공에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레스닉과 울프는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잉여에 대한 전유와 분배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해법을 내놓았는데, 이는 경제적 측면의 해법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는 연대, 평등주의, 자기 결정권에 기초해야 
카르케디는 새로운 사회 관계는 연대, 평등주의, 자기 결정권에 기초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정치적 측면의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연대는 평등주의와 자기 결정권을 함의하고, 평등주의는 연대와 자기 결정권을 함의하며, 자기 결정권은 연대와 평등주의를 함의한다. 사회 및 국가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결정을 할 때, 이러한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레스닉과 울프의 해법에 보완점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많은 업무가 파편화 되어 있고, 많은 노동자들이 단순 노동을 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업무가 지겹기도 하고, 스스로 하찮게 느낄 때가 있다. 노동이 필연적으로 파편화되고 낮은 자질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고급적으로 느껴지면서 동경 받는, 전문적이고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데, 따라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분리되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적으로 결정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업무의 파편화와 자질 낮추기는 자본주의의 특수성이다.
 노동이란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이상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해야 하는 행위이다. 스스로 계획하고 내 것이 되고,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자아 실현을 할 수 있는 노동은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주나, 지시받고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고, 결과물의 일부를 빼앗겨야 하는 노동은 소외감, 자괴감, 고통을 준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체제에서는 일자리의 재설계를 해야 하며 새롭게 구성된 일자리에서 그 노동 과정도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잠재성을 최대 한도까지 발전시킬 수 있도록, 모든 노동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는 연대, 평등주의, 자기 결정권에 기초하여 결정되어야 하는데, 바로 집단 집성의 발휘도 그런 원리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업무를 전체적으로 분류하는 사람은 노동자들이어야 하며, 이는 노동자 자신의 최대 발전과 자아 실현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직무는 바람직함, 자기 개발 가능성, 사회적 의사 결정 참여 가능성의 측면에서 균형이 잡힌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직무는 노동자의 욕구에 따라 가변적이어야 하고, 조정가능한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카르케디는 직무 변화의 방향을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의 투쟁에도 적용한다. 자본주의에서 다시 자질 높이기를 위해서 자본의 기능(관리 및 감독 업무), 육체노동, 정신노동의 분리를 폐지해 직무의 질을 동등하게 높이는 것을 목표 삼아야 한다고 한다. 자본의 기능, 즉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해 지시하고 감독하는 업무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자.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가 사라져 노동자가 온전한 노동을 한다고 상상해보자. 물론 자본주의 내에서 개선은 항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감하게 싸우자 
 카르케디는 과감한 투쟁을 하자고 말한다. 노동자에게 더 유리한 소득분배를 요구하자고 한다. 이에 기업이 노동자 축출, 폐업, 자본도피 같은 것을 부추기면 노동자는 기업을 장악하고 스스로 운영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다. 노동자가 기업을 운영할 때는 연대(기업 내에서도 외부 세계와도), 평등주의(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자기결정권(집단적 소유권)에 기초하여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안 사회경제체 아래서 생산은 생산자의 욕구에 맞게 조절되며 그리하여 자연파괴, 자본주의 폐기물, 실업, 차별 등이 모두 사라질 수 있으며, 개인의 완전한 발전이 모두에게 완전한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적 삶의 형태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경제체제 건설이라는 목표로 같이 손잡고 싸워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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