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한·일 확대 정상회담 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거듭거듭 치욕을 안겨주고 있다. 16일 도쿄 한·일정상회담 뒤의 공동기자회견에서는 구상권 포기까지 명확히 천명했다.
이제까지 윤 정부는 대위변제니 제3자 변제니 하는 표현을 수없이 사용했다. 제3자인 한국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전범기업의 책임을 떠안는 방안을 합리화하고자 그런 법리를 계속 주지시켰다.
제3자가 책임을 인수하면 제3자가 채무자에게 구상권을 갖게 되는 것이 원칙이다. 법적 의무 없이 책임을 떠안았으니, 채무자에게 변상을 청구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 질의응답 때 "만약 구상권이 행사된다고 하면 다시 모든 문제를 원위치로 돌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구상권 행사는 판결 해법을 발표한 취지와 관련해 상정하고 있지 않다"라고 못을 박았다. 차기 정부가 혹시라도 구상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내놓은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윤 정부는 제3자 변제 방식을 선언한 데 이어 구상권 포기까지 추가로 선언했다. 이런 두 단계 조치를 통해 형상화된 것은 '일본은 책임이 없다'는 이미지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모든 게 해결됐다는 일본의 거짓 주장을 2단계 법적 조치로 합리화해준 셈이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 판결에서도 판시됐듯이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양국 정부의 합의 여하와 관계없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임의로 소멸시킬 수는 없다. 윤 대통령의 선언은 양금덕 할머니나 이춘식 할아버지 같은 피해자들에게는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구상권 포기 선언에 더해, 윤 대통령의 이유 설명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제3자 변제 방식에 따라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면, 그 이유를 일본에서 찾아야 한다. 가령, '일본은 처음부터 죄가 없었다'거나 '우리가 일본을 오해했다' 같은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북한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기자회견 발표문에서 "오늘 아침 북한은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여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였습니다"라고 한 뒤 "날로 고도화되고 있는 북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일, 한·일 공조가 매우 중요"하다고 발언했다.
그는 굴욕적인 이번 조치의 이유를 북핵과 미사일에서 찾으려 했다. 북한 위협론을 내세우며 국민 인권을 탄압해온 냉전 시대의 유산을 양금덕·이춘식 같은 피해자들의 입을 봉쇄하는 일에까지 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 문제에 북한 탓
3월 16일의 윤 대통령처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도 협정 발효일인 1965년 12월 18일 이 문제에 최종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협정 체결일인 그해 6월 22일로부터 6개월 만에 조약이 발효된 이날, 박정희는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에 즈음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 속의 박정희도 일본이 아닌 북한에서 이유를 찾았다. "호전적인 중공의 사주를 받아 언제 재침해 올지도 모르는 북괴와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 한 나라라도 더 많이 우리 우방으로 만들어 상호협조관계를 맺고 그러한 국제협력의 기조 위에서 조국의 근대화와 자립경제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우리의 힘으로 국토를 통일할 수 있는 자주적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당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라고 역설했다.
북한의 위협에 맞서고자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하고 일본과 상호협조관계를 맺으면 그런 기조 위에서 우리 힘으로 통일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힘을 끌어들여 우리 힘으로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른다는 이상한 논리가 깔린 발언이었다.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미래를 위한 결단도 강조했다. "우리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를 계기로 양국이 미래지향적 발전 방향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에 미래를 얻었다는 논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날 박정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의 입에서도 미래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과거 36년간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구적(仇敵)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며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입니다. 그것은 우리 현재가 아니며, 또 미래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해에 양금덕은 36세였고, 이춘식은 41세였다. 이들에게는 일제 피해가 1965년에도 '현재'였고 2023년 지금도 '현재'다. 박정희는 식민지배 역사는 과거지사일 뿐이라며 미래에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틀린 말이었다. 윤 대통령도 새로운 미래가 열리게 됐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양금덕·이춘식에게는 그날의 아픔이 '현재'로 남아 있을 것이다.
박 정권도 윤 정권도 일본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