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이라 와전된 여순사건 소재 대중가요, <산동 애가>

분명한 근거 없고 개연성도 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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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songcing)등록 2023.03.27 08:23
해마다 산수유 꽃이 노랗게 피는 철이면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다. 산수유 산지로 유명한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에 노래비도 세워져 있는, <산동 애가>라는 곡이다. 곡조 스타일로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트로트풍인 이 노래가 돌비에까지 새겨진 이유는, 눈길을 끄는 슬픈 사연이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산동 애가>는 여순사건 때(1948년) 구례군 산동면 상관마을에 사는 백부전(본명 순례) 열아홉 살 처녀가 부역 혐의로 끌려가면서 구슬프게 불렀던 노래다. 산동면에서 부자였던 백씨 집안은 5남매를 두었으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일제 징용과 여순사건으로 희생되고 셋째 아들마저 쫓기게 되자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오빠 대신 끌려가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산동 애가> 노래비 앞에 있는 푯말에는 위와 같은 내용으로 곡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여순사건 여파로 아무 잘못도 없는 처녀가 오빠 대신 죽게 되었고, 그 죽음 현장에서 직접 지어 불렀던 노래가 <산동 애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래를 보고서 노래 가사를 다시 보면, 정말 그 비극적인 상황이 보다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 '반란'으로 규정되어 일단 진압이 되었지만, 반란군 일부는 지리산 쪽으로 이동하며 정부군과 계속 전투를 벌였다. 11월 중순에 산동면 경찰 지서가 반란군 게릴라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확인되는 것을 보면, 그 와중에 백부전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친지들의 증언 역시 상당히 구체적이므로, 백부전의 죽음 자체는 그리 의심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산동 애가>를 만들어 불렀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1960년 가을에 발매된 <산동 애가> SP음반 딱지 ⓒ 이준희

 
<산동 애가>는 사실 1960년 가을쯤 발표된 대중가요이며, 작자는 백부전이 아니라 정성수(가사)와 김부해(곡조)이다. 작사가 정성수가 백부전의 사연을 알게 되어 가사를 썼다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개연성이 매우 떨어진다. 설령 만들었다 한들, 녹음기도 뭣도 없었던 1948년에 그 가사와 곡조를 누가 어떻게 기록해서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백부전은 재판 같은 절차도 없이 처형되었을 것이고, 관련 기록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산동 애가> 외에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 인기곡 가사를 쓰기도 했던 정성수는 작사 활동을 시작하기 전 오랫동안 경찰로 근무하고 있었다. 6·25전쟁 전에는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 소속이었고, 1952년 당시에는 특경대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원로 작사가 반야월이 생전 2004년에 남긴 구술에 의하면, 1957~8년 무렵 정성수가 시경 문화반에 있었다고도 한다. 그가 작사를 시작한 때도 이 문화반 재직 시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경도 출신으로 구례군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던 정성수가 <산동 애가> 가사를 쓴 데에는 이런 경찰 근무가 배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백부전의 죽음은 당시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바였지만, 경찰 내부에서는 관련 정보를 접하기가 좀 더 용이했을 수 있다. 정성수가 1948년 당시 반란군 토벌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1960년 가을에 <산동 애가>가 발표된 데에는 그 당시 사회 분위기도 상당히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지난날 그냥 묻혔거나 진실 규명이 미진했던 사건들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대표적인 예로 1951년 2월에 국군 11사단 9연대가 저지른 서부 경남(거창·산청·함양) 양민 학살 사건이 국회 차원에서 다시 조사되기도 했다. 정성수가 여순사건 관련 곡 <산동 애가>를 만들어 발표한 데에는 그런 흐름이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62년, 1963년에 발매된 <산동 애가> 수록 10인치, 12인치 LP음반 ⓒ 이준희

 
백부전이 직접 <산동 애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 노래가 구전으로만 겨우 유통될 수 있었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금지곡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와 전혀 다르다. 1960년 가을에 SP음반으로 처음 발표된 <산동 애가>는 1962년쯤 10인치 LP음반에도 수록되었고, 이어서 1963년에는 12인치 LP음반으로도 나왔다. 구전으로만 유통되거나 금지곡 취급을 받았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상황이다.
 
1960년에 만들어져 몇 년 간 그런대로 반응을 얻었던 <산동 애가>는 이후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특별한 히트를 기록하지 않는 한 대부분 대중가요가 밟게 되는 유행 사이클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30년 넘게 옛 가요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던 <산동 애가>가 다시 언론에 등장한 때는 1990년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때부터 백부전이 처형장에 끌려가며 <산동 애가>를 불렀다는 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왜 하필 1990년대 후반에 그런 기사가 나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1995년에 실질적으로 부활, 시행된 지방자치제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역의 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알리려는 움직임이 좀 더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사랑공원에 세워진 <산동 애가> 노래비 ⓒ 방방콕콕

 
<산동 애가>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는 언뜻 전체 3절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1절과 2절 그리고 그 사이에 삽입된 대사이다. 음반에 실린 가사와 대사를 노래비 내용과 비교해 보면 <산동 애가> 가사 또한 다소 와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노래 듣기).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 놓고/ 까마귀 우는 곳을 멍든 다리 절며 절며/ 다리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산 골짝에서 이름 없이 쓰러졌네
(대사) 살기 좋은 산동 마을 인심도 좋은데 산수유 열매 따서 부모 효성 다 못하고 열아홉 살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을 나는야 간다. 꽃이 지면 다시 피고 겨울 가면 봄은 오건만 이내 몸 인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거나. 노고산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히 울어 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한을 안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 보지 못한 채로/ 회오리 찬바람에 엄마아빠 묶여 가는/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화엄사 종소리에 영원토록 울어 다오
 
노래에 극적인 배경이 있다면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들어 보게 되고, 또 그 배경을 사실로 믿고 싶기도 한 것이 일반적인 심리이긴 하다. <산동 애가>를 백부전이 직접 지었다는 얘기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극적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런 모습은 대중가요가 민요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밝힐 필요도 역시 있으니, 이른바 지식으로 세상에 기여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의 소박한 믿음을 깨는 것은 그 깨는 사람에게도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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