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왔다. '집에 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누군가 사용한 콘돔이 들어있었다'고 했다. 수사에 착수했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피해자 뒤에 선 가해자가 여성의 핸드백에 콘돔을 투척한 사건이었다. 파출소에서 최초 발생보고한 혐의는, '공공장소 강제추행죄'였다. 그러나 신체 접촉은 없었다는 이유로 재물손괴죄로 검찰에 송치됐다. 2021년의 일이다.
피해자와 직접 만난 김영은 남대문경찰서 형사과 경위는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여성청소년과에서 근무하며 피해자 보호 업무로 사건을 접했다는 김 경위는 피해자로부터 "추행당한 듯한 성적 수치심을 느꼈고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두려워 손이 덜덜 떨렸다"는 진술을 들었다고 한다. 사건을 지켜보며 김 경위는 "이 사건의 혐의가 '가방 손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근본적 물음을 던지게 됐다고 했다.
가해자는 고의로 자신이 사용한 콘돔을 여성의 가방에 넣었다. 범행에 명백한 성적목적이 드러난다. 피해자 역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재물손괴로만 다뤄지게 된 것은 형법의 한계때문이라는 게 그의 잠정 결론이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김 경위는 <형법은 누구의 법감정을 반영하는가> 연구를 시작했다.
김 경위는 보이지 않는 여성의 고통과 피해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주거침입, 절도 등 일반범죄로 다뤄지는 사안에 대한 시민들의 법감정도 파악했다. 그리고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할 제언을 담았다. 제언에는 "성적목적 주거침입죄 신설"도 포함됐다. 우리는 김 경위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김 경위의 연구는 구체적 범죄 상황에 대한 남녀 인식차를 조사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20~30대 여성 112명, 남성 106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귀가 중 모르는 남자가 집 앞까지 따라왔고 내가 집에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오려 했음 (주거침입)
이 상황을 예시로 주고, '침해 법익'을 물었다. 여성 응답자의 68.5%가 강간, 강제추행과 같은 성폭력 피해를 입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반면 남성 응답자의 경우 69.8%가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입을 것 같다고 답했다. 김 경위는 "여성은 본래 그 법이 정한 보호 법익인 주거의 평온이 침해됐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다고 느꼈으며, 범인의 의도로 성범죄적 의도일 것이라 추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장 중 세탁하려 가방에 넣어둔 속옷이 사라짐 (절도)
이번엔 절도 사건의 '침해 법익'을 물었다. 여성 응답자의 경우 '성적불쾌감 등 성적 자기 결정권 침해'라고 답한 비율(68.5%)이 가장 높았으며 그 다음이 '속옷을 입지 못하는 재산권 침해(14.8%)'였다. 남성 응답자의 경우 '재산권 침해'라고 답한 비율(35.8%)이 가장 높았으며 그 다음이 사생활 침해(22.6%)였다. 속옷 절도 사건의 범행 의도를 물었을 때도 남성 응답자의 35.8%가 '성범죄적 의도'라 답했고, 그 다음 30.2%가 '재산상의 이익'이라 답했다. 반면, 여성 응답자 중 절도범에게 '성범죄적 의도'가 있다고 밝힌 응답률은 79.6%였다. '재산상 이익'이라 답한 비율은 3.7%에 그쳤다.
왜 이 같은 차이가 발생했을까. 해당 주제로 심층 인터뷰도 진행한 김 경위는 "남성은 '내가 겪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가정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이 드러났고 여성은 '내가 피해자임'을 가정하고 답했다"라며 "범죄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범죄에 대한 민감도 역시 높은 거 같다"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여성들은 해당 범죄가 더 큰 범죄의 예비 단계로 인식해 가해자를 자극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라며 "반면 남성은 '내가 제압할 수 있다, 잡아서 처벌받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라고 덧붙였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남녀의 피해 감정 자체가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김 경위는 "여성이라면 누군가 내 집에 따라 들어오려 한다면 성폭행을 걱정할 것이며, 속옷을 도둑맞았다면 성적목적으로 내 속옷을 훔쳤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 형법은 그것을 성범죄로 보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김 경위의 연구는, 개별 사건에 대해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고통 그리고 이를 반영하지 못하는 형법 사이의 간극을 짚어낸 것이다.
김 경위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2021년~2022년 주거침입 판결문 200건 가운데 134건이 '성적목적 주거침입' 사건(성적목적이 드러났지만 주거침입으로 다뤄진 70건, 성적목적이 직접적으로 발현돼 성폭력 범죄로 다뤄진 64건)이었음을 전하자, 김 경위는 반문했다.
나머지 판결문에도 드러나진 않지만 범죄에 성적목적이 내포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렇기에, 김 경위는 성적목적 주거침입죄 신설을 "여성이 남성에 비해 느끼는 초과 두려움만큼 여성을 방치해" 온 형법 공백을 메울 대안 중 하나로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인분 투척'을 공무집행방해죄상의 폭행으로 본 판례다.
여기에 김 경위는 "성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범죄의 피해자에게는 성범죄 피해자와 동일한 수사절차상 지원을 제공해야 함"을 강조했다. 아직 법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현장에서 사건을 다루는 경찰의 대응력 또한 중요한 지점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김 경위는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