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과 노래로 남은 용인 기남이고개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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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songcing)등록 2023.01.13 14:32
경기도 용인은 인구 백만이 넘어 2022년에 특례시로 지정되기까지 했지만, 구와 읍면이 공존하는 도농복합의 독특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지구와 기흥구는 과밀과 난개발을 걱정할 만큼 도시화가 진행되어 있는 반면, 처인구의 읍면 지역에는 한적한 농촌 풍경이 여전히 제법 남아 있는 편이다.
아직 시가 되기 전 용인군 시절에는 한적함을 넘어 사람들 왕래가 불편해 산간벽지라 불릴 만한 곳도 꽤 있었는데, 용인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마을인 양지면 정수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험준한 강원도 고갯길만큼은 아니어도 정수리 도로 사정은 지금도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주민들이 면 소재지인 양지리까지 다니는 데에 종종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한다.
굽이가 많아 다소 불편은 있다 해도 현재 정수리와 양지리 사이 도로는 자동차 통행이 충분히 가능한 포장길이지만, 60여 년 전에는 사람과 소나 겨우 다니는 그야말로 산길이었다. 그 길이 정비되어 정수리 주민들이 자동차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때는 1960년으로, 그 '신작로'가 뚫린 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또 있다.
 

기남이고개 비석 ⓒ 맑은공기의 산행여행기

 
양지리에서 정수리 쪽으로 오르막길을 가다 보면 고갯마루 부근 골프장 입구 옆에 아담한 돌비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면에 적힌 문구는 '기남이고개',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건립 내력이 적혀 있는데, 고개의 특이한 명칭은 바로 박기남이라는 인물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린 박기남(朴基男)은 이곳 외가닥 고갯길을 넘어 다니다
서기 1960년 이제 참의 사람이 된 큰 박기남은 이 한길을 닦다
고개를 넘는 이들이 기남이고개라 부르며 그의 갸륵한 뜻을 생각한다
고장 사람들과 양우회가 이 일을 기념하여 여기 고개 위에 이 비석을 세우다
서기 1960년 10월 8일
 
길을 닦은 박기남은 1913년에 정수리에서 태어났다. 정수리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양지리까지 산길 20리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마친 박기남은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서 열심히 일을 했고, 결국 번듯한 기업을 운영할 만큼 성공하게 된다. 이후 40대 중년에 접어들어 여유가 생긴 박기남은 어릴 적 학교 다닐 때 산길을 오가며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고향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 6백만 환이 넘는 사재를 들여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내기로 했다.
 

박기남의 모습과 도로 개통 당시 현장 ⓒ 동아일보사

 
1959년 11월에 시작된 공사는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마무리되었고, 새 길 개통을 기념하는 동시에 박기남의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기남이고개 비석이 세워졌다. 건립 비용은 정수리 마을 주민들과 양지초등학교 동창회인 양우회에서 마련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은 1960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에도 소개되었고, 4월 혁명 이후 세상이 뒤숭숭한 상황에서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따듯하게 한 미담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1960년 연말쯤에는 <기남이고개>라는 대중가요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운하 작사, 한복남 작곡에 가수 임화춘이 녹음한 <기남이고개>는 작곡자 한복남이 운영한 도미도레코드에서 음반이 제작되었다. 작사자는 전라남도 영광, 작곡자는 평안남도 안주 출신이라 용인에 특별한 연고는 없었으므로, 아마 신문 기사를 보고 노래를 만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울고만 넘는/ 이십 리 고갯길이 얼마나 험해/ 그 어린 가슴속에 한이 되었나/ 산새들 벗을 삼고 학교를 가니/ 그 시절 생각나는 기남이고개
삼십삼 년 반평생이 꿈 같이 흐른/ 이십 리 고갯길이 얼마나 슬퍼/ 눈물로 한숨으로 돌아보았나/ 차디찬 인정세파 물리쳐 나아간/ 그 정성 고마워라 기남이고개
 
가수나 작가들은 세간의 화제를 작품으로 만들어 나름 히트를 기대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애석하게도 <기남이고개>는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조용히 묻힌 노래가 되었다. 대중의 선택이 어디로 향할지는 예나 지금이나 역시 모를 일이긴 하다.
 

<기남이고개> 음반 딱지 ⓒ 이준희

 
박기남이 사재를 출연해 길을 내겠다고 했을 때,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그의 결단은 고향 사람들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되었고, 그래서 비석과 노래를 통해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구불구불 고갯길을 더듬어 직접 비석이 있는 현장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기남이고개> 노래로나마 그날의 감흥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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