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연합뉴스
제로 근처에 머물던 미국의 기준금리가 1년도 안 돼 4.5%가 됐다. 시장에선 고금리 기조가 쉽게 꺾이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거시경제 환경, 특히 글로벌 정책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현재 미국의 고금리 정책은 주요국의 거시정책 기조 전환 흐름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0월 8일 기사에서 선진국들 사이에 '거대한 정책 역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0년대를 지배했던 '빡빡한 재정정책과 느슨한 통화정책의 조합'이 지금은 거꾸로 '느슨한 재정정책과 빡빡한 통화정책의 조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돈을 쓰되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린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미국 재닛 옐런 재무장관의 '고압경제' 전략이 있다. 고압경제란 상당 기간 강한 초과수요를 발생시켜 타이트한 노동시장을 유도하되, 일정 정도의 인플레이션과 이에 따른 명목금리 상승은 용인하는 정책기조다.
옐런이 재무장관으로 부임한 후 추진한 대규모의 확장적 재정정책이 대표적 사례다. 인플레이션이 우려될 정도의 대규모 재정자금을 미국인들 손에 직접 쥐여줌으로써 확실히 수요를 일으킨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즐겨 활용됐던 '민간화된 케인스주의', 즉 민간에게 쉽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경기를 띄우는 정책기조로부터의 이탈 또는 전환을 의미한다.
정부 재정보다는 대출과 금융에 의존했던 과거의 정책기조는 주택을 비롯한 여러 자산들이 금융상품처럼 거래되는 '금융화' 흐름과 맞물려 자산거품과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부채주도성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방식은 정부 입장에선 의회를 거치지 않고 비교적 손쉽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 자산시장 활성화는 조세수입을 쉽게 늘리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고압경제 혹은 오리지널 케인스주의
그러나 금융화에 기댄 부채주도성장은 기대했던 낙수효과보다는 불평등을 키우는 부작용을 낳았다. 노동소득보다 자산소득이 더 빠르게 늘었고, 지대 추구 행위가 확산됐다.
특히 자산이 없는 젊은이들은 자산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부채 부담을 떠안거나 가정 형성과 출산을 미뤄야 했다. 미국의 출산율이 2020년 1.64까지 떨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 영국의 신농노계급, 월세세대, 한국의 N포세대 등의 신조어들이 이런 문제들을 잘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부채주도 경제 운용은 한계에 달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1920년대 이후 최고조에 달한 불평등도, 저소득층의 소득 정체는 서민들에게 더 이상 빚을 내라고 부추기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2019년부터 올리비에 블랑샤르, 래리 서머스 등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이 상황을 반영한다.
'쉬운 돈' 때문에 자산거품과 금융 불안정성이 커졌다. 뿐만 아니라 아티프 미안 프린스턴대 교수 등이 지적하듯 대규모 자금을 빌릴 수 있는 기득권 기업들은 진입장벽을 더 쉽게 칠 수 있게 되고 기업 생태계의 역동성이 떨어지는 등 의도와 정반대의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래서 오히려 성장을 저해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됐다.
이런 한계에 대한 돌파구가 재정확대를 중심으로 한 고압경제 전략이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나 옐런 재무장관이 신자유주의적 낙수효과를 강하게 불신하는 것도 중요한 배경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와 부채주도성장을 넘어서 재정 중심의 오리지널 케인스주의가 힘을 얻게 됐다고도 볼 수 있다.
재정 중시 흐름은 2020년 이후 코로나19에 따른 재정확대, 미중 갈등 및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세계화의 후퇴, 공급망 재편, 기후위기 대응 등 산업정책의 부활과 맞물려 더 강화되게 됐다.
재정이 일으키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수요확대 효과가 세계화의 후퇴 및 공급망 재편과 결합하면 수요와 비용 양 측면에서 물가상승 압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이자율 상승은 수급 불균형으로 압력밥솥이 터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김을 빼주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인플레이션은 통제되기만 한다면 과거 누적된 부채의 가치를 낮춰준다. 장기저리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렸던 주요국 정부들의 입장에선 앉아서 실질 수입이 늘어나는 효과가 발생한다.
물론 당면 과제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선 금리인상으로 달러가치를 높이면서 다른 나라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자국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다른 나라로 수출하고자 한다. 또 세계 경기를 일정 정도 둔화시켜서라도 에너지 수요를 줄임으로써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여러 나라들이 통화가치 하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가속화를 막기 위해 이른바 '역환율 전쟁'을 벌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금리를 올리고 세금을 더 걷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을 활용해 에너지 가격 상승 등이 가져온 부작용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기조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주요국은 코로나19로 인한 이례적 수준의 재정확대는 정상화하되 코로나 이전에 비해서는 재정지출을 높게 유지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유럽연합은 8070억 유로(약 1088조 원)의 '차세대 펀드'를 지역 내 연대성 강화에 쓰려 하고 있고, 독일은 가스 수입업체를 국유화하면서 에너지 보조금을 포함한 경제방어막을 국내총생산(GDP)의 5.2% 수준으로 구축하고 있다.
재정준칙은 우회한다. 프랑스는 프랑스전력공사(EDF)를 국유화하고, 일본은 가구당 평균 4만 5천 엔(약 43만 원)의 에너지 보조를 포함한 71.6조 엔(약 688.3조 원) 규모의 종합경제대책을 추진한다.
이 와중에 영국에선 리즈 트러스 총리가 법인세 인상 계획 철회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 부활을 야심차게 추진하다 시장의 거센 반발을 못 이기고 사퇴한 바 있다. 감세와 규제완화라는 1980년대식 정책기조를 재현하려다 실패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례적으로 미국 바이든 대통령도 '실수'라고 비판할 정도로 글로벌 역풍이 일었다. 다른 나라들이 증세를 추진할 때 감세로 기업을 유치하자는 트러스 전 영국 총리의 구상은 글로벌 왕따를 초래했고, 감세로 기업이 성장하면 세수가 확대돼 재정이 건전해진다는 논리는 시장의 불신을 야기했으며, 부자감세가 낙수효과를 일으킨다는 주장은 여론의 냉대를 받게 됐다.
트러스 전 영국 총리 사태의 진정한 문제는 전시에 버금가는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통합과 사회연대, 고통분담보다는 부자감세와 같은 이념적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했다는 점이다. 트러스의 후임인 리시 수낵 총리는 같은 보수당 소속임에도 이전의 증세 계획, 즉 법인세 25% 인상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언제까지 줄타기 계속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