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캘커타 폭동. 인도 파키스탄 분단의 와중, 인도 전역은 폭력 사태에 접어들었다.
국립 간디박물관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했고, 그보다 하루 앞선 8월 14일 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했다. 분단의 기준은 간단했다. 지역별 인구 조사에 근거해 힌두가 많으면 인도연방, 무슬림이 많으면 파키스탄. 하지만 세상은 이런 간단한 원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국 직할 지역은 그나마 문제가 없지만 비 직할지, 360여 개에 달하는 영국령 보호국은 그 땅을 다스리는 지배자 입장도 중요했다.
인도 남쪽 한가운데 있는 골콘다 왕국(현 안드라 프라데시주 일대)의 술탄은 무슬림이었기에 파키스탄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도로서는 내륙 한가운데 이슬람 국가가 생긴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이 지역은 인도군이 진입해 합병해 버렸다.
오늘날까지 시끄러운 카슈미르는 인구 다수가 무슬림이었으나 통치자인 마하라자가 힌두인 경우에 속한다. 분할 독립의 조건상으로는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이 되는 게 맞지만, 왕 입장에서는 지위 보전이 중요했다. 인도연방은 왕국들이 인도연방에 가입할 경우 왕이 누리던 특권의 상당수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카슈미르는 전쟁까지 거치며 인도연방이 됐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무슬림 거주민들의 뜻은 무시됐다.
제일 골치 아픈 지역은 동쪽 끝의 벵갈과 서쪽 끝의 펀자브지역이었다. 벵갈은 이미 영국에 의해 주가 분할됐던 전례가 있었고 이에 따라 국경을 나눌 수 있었지만, 펀자브의 경우는 기준이 없었다. 단지 1941년 인구 조사에 따라 서 펀자브의 인구는 약 70%쯤이 무슬림이고, 동 펀자브은 무슬림이 과반에 못 미쳤다. 여기에 펀자브에는 시크교라는 힌두도 아니고 무슬림도 아닌 사람이 400만이나 됐다.
분할은 영국인 래드클리프 경의 지도하에 두 명의 힌두와 두 명의 무슬림으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 단 5주 만에 결정됐다. 그 위원회가 시간에 쫓겨가며 그은 지도의 선으로 인해 3300만 명의 인구가 대이동을 해야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자국에 남게 된 무슬림과 힌두들에게 재산의 안전과 안녕을 보장한다고 했지만, 그건 밑바닥 정서를 전혀 모르는 정치인들의 낭설에 불과했다. 이미 국경선이 확정되기 전부터 힌두와 무슬림은 서로를 학살하고 있었다.
국경이 확정되자 파키스탄이 된 땅에서는 힌두가 살 수 없었고, 인도가 된 땅의 무슬림도 그대로는 살기 힘들었다. 둘 사이에 끼어버린 소수 종파인 시크교는 인도연방을 택했다. 자신의 이해와는 전혀 상관없이 지리적 분할이 이루어진 탓에, 시크교를 만든 구루나낙의 탄생지도, 시크교 왕국이 있던 고도 라호르도 모두 파키스탄의 일부가 되는 걸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지정된 짧은 기한 동안 재산을 모두 정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많은 이주민들은 값나가는 소수의 금붙이와 이동 중 밥을 해 먹을 생필품 정도만 들고 고향을 등져야 했고, 이 와중에 버린 땅이나 집을 차지하기 위한 수많은 음모극이 벌어졌다.
가장 흔한 방법은 가장 나이 많은 여성을 제외한 온 가족을 죽인 뒤, 그 살인범이 피해 가정의 양자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다. 시간이 흐르면 양엄마가 먼저 죽을 테니 모든 재산은 결국 살인범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살려둔 '인질'이 증언을 하면 혀를 자르면 될 일이다. 어차피 양자로 받아들인다는 수인만 있으면 합법적인 입양을 위한 서류는 완성되고, 혹시나 이 상황을 의심하는 경찰(그 당시엔 있었을 리 없지만)이 있으면 약간의 돈을 찔러주면 됐다.
쌍방에서 오가는 수많은 피난민의 행렬은 최대 수 킬로미터까지 이어졌는데, 이들을 약탈하려는 원주민 집단이 있었고 이주민들은 이들과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야 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때로는 자기 집단 내에서 여성에 대한 명예 살인이 이루어졌다.
시크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