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총독부의 인정을 받은 친일 지역유지
그는 총독뿐 아니라 일본 극우단체인 동광회와도 인연이 있었다. 이 단체의 조선총지부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외부세계와의 이 같은 연계 속에서 그는 영리 사업을 하는 동시에 지역 내의 경제·행정·종교 등에 손길을 뻗쳤다.
그가 지역유지로 등장한 시점은 33세 때인 1910년 10월부터다. 그해 8월 29일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한 직후에 고향의 실력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기옥 편을 근거로 1910년 10월 이후 그가 지역 사회에서 역임한 주요 직책을 시간순으로 열거하면, 김화금융조합(농협) 평의원, 동양생명보험㈜ 대리점장, 김화소방조(의용소방대) 부(副)조두, 김화군청 참사, 강원도 도평의회 의원(4선), 김화축산동업조합장, 강원도농회 특별위원, 김화수리조합장, 김화상조회 이사, 김화합동운수조 사장, 김화세무서 소득조사위원, 김화군 학교비 평의회원, 강원식산㈜ 발기인, 김화주조㈜ 취체역(이사) 및 감사, 김화불교청년회 고문, 강원도양곡㈜ 감사역 등이다. 지역 내 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군사후원연맹 김화군 지부 고문과 국민총력조선연맹 강원도 지부 평의원 등도 역임했다. 지역 내의 인적·물적 자원을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활동도 병행했던 것이다.
1928년에는 히로히토 일왕(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35년에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 1940년에는 기원 2600주년 기념장 등이 그에게 수여됐다. 1915년에는 조선인 시찰단원으로 선발돼 일본에 가서 다이쇼 박람회를 시찰할 기회도 주어졌다. 일본 정부와 총독부의 인정을 받는 친일 지역유지의 전형적 패턴을 밟았던 것이다.
김기옥의 친일은 이익이 많이 생기는 친일이었다. 총독의 양자로 알려진 사실이 자기 명의의 영리 사업은 물론이고 각종 기관장 취임에 어떤 작용을 했을지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19년부터 1년 넘게 김화군 참사로 근무한 적도 있지만, 금융조합이나 수리조합 등에 근무한 경력이 훨씬 더 큰 이익이 됐으리라는 점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후원을 받는 가운데 그런 직책들에 취임하고 이를 이용해 지역민들을 군국주의 전쟁으로 내몰았다. 기관장 근무를 비롯한 각종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친일 재산이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그의 친일은 이윤이 발생하는 친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친일이 국권 침탈 이후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제의 한국 강점이 완성된 1910년 하반기부터 고향에 정착해 친일 활동을 벌였다면, 일제의 한국 침략이 한창 진행되던 1910년 상반기까지는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친일을 했다.
일제가 한국을 향해 돌진할 때는 고향을 떠나 친일하고, 일제가 한국 강점을 완성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친일했다. 일제의 한국 강점이 일단락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개인의 기반을 굳히면서 친일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