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떠난 현재의 밤섬. 서강대교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풍경. 1968년 섬이 폭파된 이후, 그 자리에 다시 모래와 흙이 쌓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옛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큰비가 내릴 때는 섬 전체가 물밑에 잠겼다가 다시 드러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1999년 서울시 최초로 생태경관보전 지역으로 지정됐다. 2012년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하는 지역으로 인정받아 생태계 보전지역인 람사르습지로 등록됐다.
성낙선
국가 권력에 희생된 밤섬의 비극
서울시는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가능하면 추가 금액 없이 신속하게 자재를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밤낮으로 여의도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던 그들에게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구상이 하나 떠올랐다. 여의도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밤섬'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밤섬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대대로 배를 만들거나 농사와 어로 활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500명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밤섬은 또 경치가 아름다워서 시인 묵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한강에서는 보기 드물게 바위 언덕이 있는 섬이었다. 마포8경 중에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그런 밤섬도, 주어진 시간 안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서둘러 공사를 끝마쳐야 했던 사람들에겐 그냥 돌과 흙이 잔뜩 쌓여 있는 자재 더미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결국, 여의방죽 공사를 시작하기 하루 전날인 1968년 2월 10일, 한겨울에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듯 밤섬을 폭파했다. 밤섬은 산산조각이 나면서 순식간에 대량의 돌과 흙으로 변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밤섬 주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밤섬에 살던 사람들은 한강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와우산 산비탈로 쫓겨났다. 더 멀리 쫓겨날 판이었는데, 밤섬 주민들이 고향 땅 근처에 머물게 해줄 것을 간청한 결과였다. 아름다운 밤섬은 그때 그렇게 사라졌다. 그곳에서 700년을 이어온 주민들의 삶도 함께 수장됐다. 여의방죽을 쌓는 공사는 다음날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공사는 번갯불에 콩 볶듯이 요란하게 진행됐다. 전국의 중장비를 동원해 24시간 둑을 쌓았다. 그리고 장마가 지기 전인 6월 1일, 작업을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