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김병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그는 1990년 12월 6일 숨을 거뒀다.
김은희제공
엄마가 유방암으로 눈을 감은 게 2014년이어요
"원망스럽게도 암덩이는 엄마에게도 닥쳤어요. 유방암이었죠, 2012년 가슴을 도려내는 1차 수술을 했는데 1년 만에 재발을 했어요. 2013년은 제가 일본에서 '마을재생'에 관한 공부로 석사를 마쳤을 때였어요. 그 무렵 엔화가 제일 비쌌죠. 한때 1700원까지 갔으니.
엄마는 젊어서 아빠의 옥바라지에 청춘을 보냈고 나이 들어서는 딸 둘이 대학원까지 공부하는 바람에 우리에게 모든 걸 바치셨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일을 할 때라 월급이 있었으나 벅찼을 거예요. 일본에서 취업하고 싶었지만 서둘러 돌아왔어요.
암에 걸렸을 때 엄마가 일을 놓았어야 했는데... 1차 수술을 받기 전까지 사료관장 일을 하셨어요. 나중에 엄마 유품을 정리해보니 아빠 상을 치를 때 받은 방명록, 조의금 봉투를 다 보관하고 계셨어요. 엄마는 주변에서 베풀어준 사랑에 어떻게든 보답하려 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어려워도 어렵다고 하지 않고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요."
박문숙이 몸에 이상을 감지한 것은 2007~2008년 무렵. 국립암센터에서 조직검사를 한 그는 딸들에게 아무 일 없고 괜찮다고 했다. 그때 그의 몸에는 암이 또아리를 틀었던 모양이다. 박문숙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사료관장으로서 '4월혁명 사료총집'에 누구보다 큰 애착을 가졌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료집발간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는 사료관장의 업무만이 아니라 민청학련 재심,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명예회복과 국가폭력에 대한 보상 문제에도 발 벗고 나섰다. 유가협가족의 일도 자기 일처럼 돌봤다. '민주화운동의 맏언니'라는 호칭이 그에게 결코 과하지 않았다.
자매에게 남은 건 홍제동 방 두 칸의 전세보증금
"엄마가 돌아가시고 저희에게 남은 건 홍제동 두 칸짜리 방의 보증금이 전부였어요. 어려서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철산동 주공단지에서만 1219동에서 238동, 111동에서 1016동, 1218동에서 호수를 달리해서 다시 1016동으로. 내 집이 없으니 기한이 되면 이사 가고 또 이사간 거겠죠. 나중에 주민등록초본을 보고 놀랐어요. 안양으로 가서도 비산동, 호계동, 평촌동, 석수동까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때는 아빠를 원망했어요. 아빠가 돌아가신 날 이모들 몇 명이 기다리다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저를 안고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나요.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옷을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갔어요.
어른들이 모두 울고 있어서 저도 같이 울었어요. 아빠를 생각하면 우리 가족을 좀 지켜주지, 엄마를 좀 지켜주면 안 됐나 하는 생각을 했었죠. 이제는 제가 아빠가 돌아가실 때 나이를 넘어서고 보니 아빠의 매 순간 결정이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돼요. 너무 늦었지만, 마음속 깊이 아빠에 대한 지지를 보내요."
1979년 광주교도소에 있을때 김병곤은 자치반장이었다. 그때 광주교도소 특별사동의 한쪽 켠에는 북에서 온 공작원과 남로당원 37명이, 반대편에는 이영희선생을 비롯 긴급조치와 학생운동 관련 인사34명이 있었다. 그는 수십 년간 면회 한 번 온 적 없고 돈 한 푼 없는 장기수를 위해 감옥 내 빈부 차이를 없앴다. 영치금을 한데 모아 물품을 구입하고 장기수에게 비타민을 선물했다.
박정희 정권과 싸웠으나 반공이 신념인 목사도 설득해 모든 양심수의 단합을 이뤄냈다. 교도소와 싸워 운동시간을 늘리고 하늘을 못 보게 창문을 가리던 널빤지를 뜯어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어 있던 이영희선생은 젊은 김병곤의 큰 품을 칭찬했다.
김병곤은 결혼 후 첫 징역을 살 때인 85년, 면회 온 박문숙에게 이 학생은 영치금이 없고, 저 학생은 내복이 없으니 넣어주라고 부탁했다. 두 딸의 우윳값도 빠듯한 박문숙은 어떻게든 돈을 구해 어려운 학생을 돌봤다. 부부가 바라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양지바른 곳에 모시니 맘이 편해요
"아빠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었으나 아빠의 동지, 친구, 선후배들이 해마다 빠지지 않고 찾아왔어요. 겨울이고 응달이라 추모제 때마다 미안했어요. 이젠 눈물이 마를 때도 되었고 잊힐 만도 한데 기억해주는 분들이 너무 고마워요. 마침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양지 바른쪽 묘지터가 나와서 합장했어요. 아빠, 엄마의 묘소로 올라가는 길에 문익환 목사님, 김근태 아저씨. 이범영 삼촌의 묘소가 있어서 더 푸근해요.
엄마는 자기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어요. 지금 엄마가 있던 병실로 돌아간다면 엄마의 아픔을 들어주고 엄마의 등을 어루만져 줄 것 같아요. 엄마는 항상 삭히기만 했어요. 엄마도 많은 날을 하얗게 새웠겠죠. 10여 년 넘게 제가 안고 있는 이 불면의 밤은 엄마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언니나 나나 외면만 했던 우리의 상처를 글로 풀어내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빠는 구로구청에서 경찰이 들어오는 날 말할 수 없는 고뇌가 있었다고 회고했어요. 아내와 두 딸을 두고 다시 갇힐 것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겠죠. 우리 가족에게는 불면의 밤이 숙명이었나봐요."
<못 다한 이야기>
① 정금채, 임상택, 박석운, 장상환, 주대환, 이범영, 김희택, 정은교 등 주로 서울대 학생운동 선후배가 1983년부터 철산리 주공아파트 단지에 이웃해 살면서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② 박문숙은 김병곤 못지 않은 투사였다. 1986년 김병곤이 춘천교도소에서 소내 민주화투쟁을 하다 징벌방에 갇혔을 때, 박문숙은 면회를 요구하며 한겨울에 교도소 앞마당에 이불을 펴고 농성을 시작했다. 김병곤은 당시 극심한 형벌을 당했다. 그는 비녀꽂기로 온몸이 결박된 상태에서 두드려 맞았다. 손발을 뒤로 묶인 채 개처럼 밥을 먹고 대소변을 봐야 했다. 폭행으로 장 출혈이 있어 몸 아래로 피가 새어 나왔다.
박문숙은 싸움이 길어지자 춘천의 인권사랑방에 농성장을 만들었다. 같이 징벌을 당한 양심수의 가족을 모으고 카톨릭농민회와 강원대생의 지원을 받아 금치 중단을 이뤄냈다. 그는 오희창교도소장과 보안과장 등을 춘천지검에 고소했다. 결과는 단 한 줄 '혐의없음'이었다. 그는 다시 재정신청을 했다. 이마저도 기각이었다.
김병곤이 춘천교도소에서 당한 비녀꽂기는 "손목에 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포승줄로 손목을 꽁꽁 묶은 다음, 묶은 두손을 머리 뒤로 젖혀 빼내어 허리 뒤쪽에 감아놓은 포승에다 연결해서 잡아 당긴뒤 위로 올라간 양팔과 뒷머리 사이에 긴 곤봉을 끼워놓는 형벌"이다. <김병곤평전>(실천문학사, 188쪽에서 인용)
③ (사)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는 올해 네 번째 '민주화운동,그 기억과 희망나누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희망나누기사업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과 유자녀를 지원하고 있으며, 올해는 11월 30일까지 추전을 받고 있다. 김병곤님의 따님 김희진, 김은희님은 2020년 1월의 첫 번째 희망나누기에서 생활지원 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 김희진, 김은희 두 분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에게 먼저 지원이 되어야 함에도 이를 받게 되어 송구하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④ 김은희는 일본에서 공부한 '마을재생'의 전공을 살려 서울시의 마을만들기 사업에 시민운동가로 결합해 일을 했다. 지금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 둘과 함께 '지구도 방학이 필요해'라는 환경기업을 만들어 방학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냈다.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은 아니지만 '기후위기'에 맞서는 사업을 해보려 한다. 우선 주목하는 것은 판촉물, 시중에서 유통되는 판촉물은 지나친 포장도 문제고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 이는 공공에서 발주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재생이 되면서 쓰레기가 적게 나오는 판촉물을 설계하고 민간과 공공에 이를 알리고 운동 일선이 아니라도 이처럼 다양한 삶의 공간에서 펼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김병곤 평전
김현서 지음, 실천문학사(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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