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황제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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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유럽은 정치개혁과 산업혁명의 물결이 일고 있었지만 새로운 러시아 황제는 전제주의를 고수하며 개혁을 거부했다. 러일전쟁으로 산업은 피폐했고 민심은 바닥을 쳤으며 정치는 불안해져갔다. 하지만 니콜라이에게는 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로 아들이었다.
알렉세이는 4명의 공주 이후 얻은 유일한 후계자였지만 불행하게도 혈우병을 가지고 있었다. 혈우병에 걸리면 조그만 충격에도 멍이 들고 피가 멈추지 않아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알렉세이는 황제 부부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지켜야 할 미래였다.
1905년 황태자에게 위급한 일이 생긴다. 낙상으로 피가 멈추지 않아 위험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의학으로 해결되지 않자 황제는 한 남자를 궁으로 부른다. 훤칠한 키에 우람한 체격, 깊은 눈과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그레고리 라스푸틴이었다.
라스푸틴의 과거는 신비와 사실로 뒤범벅되어 있다. 도둑질로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시베리아를 떠돌다 수도원에 들어간다. 계율이 딱딱하고 위계가 엄한 러시아 정교는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결국 사교에 발을 들인 그는 스스로를 예언자이자 치유자로 부르며 사람들을 현혹했다. 특히 상류층 여성들에게 사제이자 상담사로 인기를 얻으며 영적인 존재로 자리를 잡았다.
기록에 따르면 라스푸틴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진정시켜주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정신과 의사나 무당 혹은 법사와 같은 존재였다. 19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온 그는 점차 상류사회에서 치유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 소문을 들은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놀랍게도 라스푸틴의 치료를 받은 황태자 알렉세이는 호전됐다. 이를 본 황후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다. 아들 문제로 편집증을 앓고 있던 그녀에게 라스푸틴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황후는 라스푸틴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의존했다.
황실을 등에 업은 라스푸틴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비선 실세가 된다. 군사, 사회, 인사 등 국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실질적인 정치권력까지 휘둘렀다. 황제와 황후 앞에서는 고상한 사제인 척했지만 뒤로는 재산을 빼돌리고 문란한 생활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궁정 안팎으로 라스푸틴을 경고하고 멀리할 것을 조언했지만 황제 부부는 듣지 않았다. 점점 러시아 황실은 라스푸틴이 쳐놓은 장막에 갇혀 현실과 동떨어지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의 몰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