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5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친 뒤, 불참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석 사이로 걸어나오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힘들다. 삶이 나아지질 않는다. 열심히 버티고 있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이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슬프다. 잊힐 만하면 가슴을 헤집는 상처가 다시 생겨난다. 누가,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것을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다. 억울해서 화가 나서 이리저리 뭔가를 찾아보면 생각은 더 복잡해진다.
고민 끝에 마주하는 답은 이렇다. '이건 내가 만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남 탓하는 것은 싫다. 하지만 마지막에 부닥치는 답은 그렇다. 그러면 올바른 질문이 나온다. '내 문제는 누가 만든 것인가? 이 문제는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정치가 떠오른다. 먹고 사는 민생, 생명과 관련한 안전, 외교와 안보,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하는 정치인과 정당의 모습이 그려진다. 선거 때마다 정치만 잘 되면 대한민국은 더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로 소중한 한 표를 던졌던 기억이 소환된다. 하지만 항상 그 지점에서 멈춘다. 그 기대가 현실이 된 적이 없다. 오히려 기대는 실망감으로 변했다. 실망을 넘어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느꼈던 기억도 많다. 특히 요즘에 더 그렇다.
민초의 삶이 녹록지 않다. 그런데 정치권은 정쟁만 일삼고 있다. 민생을 외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민생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데 더 혈안이다. 연일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친 원수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는 모습이 연출된다. 정치인과 정당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정치권이 싸우는 모습이 볼썽사납다. 하는 모든 얘기가 공염불처럼 들린다. 한국정치는 삼류라는 평가도 후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도 정치에 있다. 정치가 문제지만 해결책도 정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정치가 이대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특히 정당이 변해야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오징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치인보다 정당이 중요하다
무엇이 정치를 엉망으로 만드는가? 이렇게 질문하면 대통령, 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이 먼저 떠오른다. 누가 정치를 엉망으로 만드는가를 질문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사람이 떠오른다. 추상적인 대상보다 사람을 특정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정치를 바꾸려면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정치인은 항상 바뀐다. 헌법상 연임이 불가능한 대통령은 5년마다 새로운 인물로 대체된다. 국회의원은 연임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불신과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이 큰 상황에서 선수를 늘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 기존 정치인은 용기 있는 퇴장,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교체의 대상으로 낙인이 찍혀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인물보다는 좀 더 제도적이고 안정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 핵심은 정당에 있다. 정치인보다 정당이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치인의 교체보다 정당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커져야 한다. 그래야 한국정치가 비로소 의미 있는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정당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시민은 온전한 주권을 갖지 못하고 절반의 주권만을 가질 뿐"이라고 지적한다. 선거는 지지를 넓히는 것이 중요한 숫자 게임이다. 정당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 많은 지지를 받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은 없다면 정당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정당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야 정치 영역에서 소외된 시민이 줄어든다.
하지만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확산성이 없다. 정체성만 강조한다. 적과 동지로 피아를 구분하면서 소모적인 정쟁만을 일삼는다. 정당 내부에서도 이견은 허용되지 않는다. 집단사고가 팽배해 더 선명하고, 강하고, 극단적인 목소리가 주류를 형성한다. 이에 반대하면 배신자라는 딱지와 함께 강성 지지자들의 응징이 시작된다.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는 문화가 사라진다. 협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힘들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그 원인을 정당으로부터 찾은 것은 적실하다.
국민의힘은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외형적으로 분명한 보수정당의 승리다. 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찜찜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의 당선을 보수정당의 승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윤석열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었다. 단 몇 개월 만에 대선 후보로 변신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례적이고 파격적이다. 경험과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의 가치를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엄밀하게 말하면,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서 자신의 진영에서 스스로 후보를 키워 배출하는 데 실패했다. 외부자의 힘을 빌려 정권 교체를 한 것이다. 조직으로서의 국민의힘보다 윤석열 후보 개인의 힘과 에너지가 더 크게 느껴지는 대선이었다고 주장해도 큰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다.
또 한편으로 국민의힘이 잘해서 대선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가 못해서, 이재명 후보여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는 평가도 신경이 쓰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내로남불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이재명 후보를 둘러싼 논란이 크게 제기되지 않았다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국민의힘이 대선 과정에서 내세운 가치와 정책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추상적으로 자유, 공정, 법치를 강조한 윤석열 후보의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귓가에 머문다. 갑자기 대선 후보가 되었기 때문에 국민의힘과 윤석열 후보 간에 관계를 형성하고, 소통하고, 준비할 시간은 부족했다. 대선 과정에서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후보 간의 미묘한 갈등이 불거진 이유이기도 하다.
윤석열 승리는 국힘의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