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문학으로 우뚝 세운 '불멸의 소녀상'

검토 완료

김태완(moveon1821)등록 2022.11.15 10:14
파친코와 함께한 4세대의 삶

이민진의 <파친코>는 '자이니치'라 불리는 일본내 한국인 들의 신산스러운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그들이 일본으로부터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소설의 형식을 띤 '고발장'이다. 미국에 사는 이민자의 눈으로 바라본 일본에 사는 이민자의 이야기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면 본격적인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 소설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역사적 무게가 존재한다.

1910년부터 1989년까지 80년 가까운 시간 동안 4세대를 관통하는 삶이 시간순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장소와 시기가 각 챕터의 제목이 된다.(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Apple TV의 동명 드라마는 시공이 교차하는 방식.)

파친코는 일본에서 성행하던 도박(기계)을 일컫는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 파친코인 이유는 주인공 선자의 두 아들 모두와 하물며 미국 유수대학를 졸업한 손자 솔로몬까지 종국에는 이 파친코업계에 뛰어 들기 때문인 듯하다. 비록 야쿠자와의 연관성이 깊어서 천시되는 직업이었지만 자이니치들에게는 꽤 돈을 만질 수 있는 수단이었고, 실제 선자의 가족들은 이 비즈니스에 기대어 삶을 영위해 가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에게든 삶은 '대를 잇는 마라톤'이다. 파친코는 이들 4세대의 삶을 이어주는 바통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민자 노아

이 소설에서 작가가 아마도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인물은 노아인 것 같다.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그가 살아낸 길지 않은 인생을 통해 작가 이민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자이니치들의 내면적인 고통을 나지막이, 그러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노아는 엄마 선자와 야쿠자 한수와의 혼전관계로 태어났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선자와 결혼한 병약한 책상물림 남편, 목사 이삭과의 사이에 씨 다른 동생 모자수(모세)가 있다. 두 아이는 성격과 취향이 완전히 다르다. 겉모습은 피를 물려받은 생부를 닮았지만. 야쿠자로, 고리대금업자인 한수의 아들인 노아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면서생 목사의 아들 모자수는 돈 버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마침내 노아는 와세다대에 합격하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려는 순간 한수가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그는 등록금뿐 아니라 거주비에 생활비까지 노아의 풍족한 대학생활을 지원하는데 온 정성을 쏟는다. 이뿐 아니라 동경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선자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한수는 매우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요 옛 연인이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속물적이고 진실성이 결여된 자수성가한 현실주의자에 불과하다. 그는 민족도, 종교도, 심지어 사랑도 관심이 없다. 예수도, 부처도, 국가도, 황제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 믿을 뿐. 단지 그가 원하는 것은 아들 노아가 좋은 학벌을 가지고 세상에서 나와서 출세하는 것을 바라보는 대리만족이 전부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이기적인 부성이 노아를 끝내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을 한수는 알지 못했다.

그저 너그러운 한인 독지가로 알고 있던 한수가 자신의 실제 아버지임을 알게 된 노아는 절망하며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가족을 떠나 소도시 나가노로 잠적한다. "왜 생부 얘기를 먼저 해주지 않았느냐?"는 외마디 울부짖음과 "한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은 되갚겠다"는 응어리진 '부채의식'을 편지로 남기고.

노아의 죽음

이 소설의 클라이 막스는 단연 노아의 죽음이다. 나가노로 잠적한 노아는 파친코 매장 매니저로 일하며, 아이를 3명까지 둔 완전한 일본인 '노부오 반'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야쿠자 조직을 동원하여 노아를 찾던 한수는 결국 16년간 숨어살던 노아의 은신처를 알게 된다. 뜻하지 않게 엄마 선자와 조우하게 된 노아! 겉으로는 평온한 대화가 이어지고 다시 연락할 것을 약속하지만, 노아는 엄마와 헤어지자 마자 권총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작가는 그런 죽음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다만, 이민진이 하버드대에서 소설 파친코에 대해 강연할 때 한 말에서 그 해답의 단초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일본계 학생의 질문 "일본인과 재일동포 간의 간극을 어떻게 하면 매울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에서 작가 이민진은 "내 인생의 아젠다는 모든 사람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말했다.

노아는 처음에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되려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오히려 감추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생부 한수의 출현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들어 일본인으로서 삶을 택했는데 그 은신처도 발각되었다. 자신은 이제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게다가 길러준 백면서생 목사 이삭의 아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낳아준 수치스러운 야쿠자 한수의 아들인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이중의 '존재적 아노미'상태가 그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간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도 노아의 선택에 쉽게 동조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겪었을 내면의 고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사는 이민자들에게는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하는 '이방인' 으로서의 공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문학으로 넓혀가는 진실의 연대.

7세에 미국으로 이민간 작가나, 일본에서 태어난 노아나 모두 한인 가족이민사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노아는 이민진 본인이고,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 모두의 이름이다. 단지 노아를 '이민자'라는 보편적인 틀에만 가두어 둘 수 없는 것은 그가 산 곳이 일본이고,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침탈한 시기가 소설의 주요 시대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당한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지배자 일본을 무조건 저주하고 비난하는 것만으로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나 작가가 지적하듯이 "식민지배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그들이 정직하지 않으므로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모든 독자를 "한국인으로 만들어"서 "진실은 반복해서 얘기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고 한 것 같다.

이런 그녀의 의도는 영문 원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는데, 소설 구석구석에서 이텔릭체로 된 한글표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엄마(umma), 아빠(appa), 아저씨(ajusi). 아줌마(ajumma) 등 호칭은 그래도 쉬운 편. 제사(jesa), 반대(bandeh), 아이구!(aigoo!), 어머!(ummu!) 등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아무 부연 설명없이 간간히 섞여 있다. 아마도 작가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몸속 깊은 곳의 한국어를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작가 '인생의 아젠다'를 이루려 한 것으로 보인다.

노아가 죽기직전까지 길러준 아비 이삭의 무덤을 찾았다는 묘지관리인의 설명을 듣고 선자가 열쇠고리에 달린 노아의 사진을 남편의 무덤가에 묻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마지막 챕터 <동경, 1989년>이다. 그로부터 벌써 30년이 넘게 지나갔고,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포함하여 시대적 역경을 온몸으로 헤쳐온 피해자들 모두 하나, 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동안 한국은 경제력 10대 강국 반열에 올랐음은 물론, 영화, 드라마, 클래식/팝 음악 등 모든 한국문화(K-Culture)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문화 선진국'의 자부심도 더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35년간의 강제침탈과 국가 주도로 벌어진 반인륜적인 종군위안부나 강제징용에 대해 인정하기는 커녕 되려 왜곡하고 폄훼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둘러싼 '총성없는 전쟁'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지금, 이민진의 '파친코'는 전세계인의 마음속에 훼손할 수 없게 우뚝 세운 '불멸의 소녀상'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토론토 영락교회 계간지 '영락' 2022년 가을호(2022.11월 발간)에 다른 제목으로 게재 되었습니다.
첨부파일 파친코-v2.docx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