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2루수 강기웅유격수 류중일과 함께 한국 야구 역사상 최강의 키스톤콤비를 이루었던 천재 2루수 강기웅. 자신의 몸에 푸른 피가 흐른다고 말하던 그는 라이벌 현대로 트레이드가 결정되자 미련 없이 옷을 벗었다.
삼성 라이온즈
그런 무리한, 혹은 무례한 결정에도 선수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그것 외에 선수 생활을 이어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보유권을 가진 구단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보유권이 옮겨지면 그에 따라 옮기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거부할 유일한 방법은 선수 생활을 포기하는 것인데, 그런 길을 실제로 택한 이도 있었다. 바로 1990년대 초중반 한국을 대표하는 2루수였던 삼성 라이온즈의 강기웅이다.
1995년 경기중 부상을 당한 뒤로 부진이 이어지자 1996년 말 트레이드되었는데, 더구나 가야 할 팀이 삼성 시절 가장 치열하게 부딪혀왔던 라이벌 현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는 옷을 벗고 말았다. 트레이드를 거부하며 '은퇴 불사'를 외쳤던 선수들은 많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단행한 것은 강기웅이 처음이었다.
강기웅의 사례는 삼성과 현대 두 구단을 당혹하게 했을 뿐 아니라 모든 구단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것은 트레이드가 선수에게 은퇴보다도 싫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선수들이 늘 구단 결정대로 따르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강기웅의 분노는 2년 뒤 해태로 트레이드된 팀 후배 양준혁의 분노로 이어져 선수협의회를 재건하는 계기가 됐고, 그렇게 모인 목소리는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가 '구단의 일방적인 트레이드 권한'을 포함한 KBO 규약의 8개 조항에 관해 시정 명령을 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KBO 역시 구단들이 트레이드 대상이 되는 선수와 사전 협의 절차를 거치도록 규약을 개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트레이드 과정에서 구단과 협의할 수 있었던 선수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은 여전히 언론 보도를 통해서, 기자의 질문을 받고서야 처음으로, 혹은 상대 구단 직원의 환영한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자신의 소속 구단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20년이 흐른 2021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트레이드 때 선수와 협의하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시킨 프로스포츠 표준계약서를 발표했을 때 프로야구계 안팎에서 '진일보'라는, 새삼스러워서 민망한 평가가 다시 나왔을 정도였다.
영리한 트레이드, 예를 갖춘 트레이드
그렇다면 구단들은 어떻게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명령에 따라 KBO가 개정한 규약마저 지키지 않고 일방적인 트레이드를 계속해올 수 있었을까? 왜 2021년의 표준계약서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하는 이들이 적을까?
아마도 상시 감독하며 문제를 시정할 의지를 가진 제3의 힘이 없다면, 여전히 구단의 절대적인 보유권 아래 있는 선수가 규약 혹은 표준계약서 위반을 지적하며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선수와 구단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시정되지 않는 한 규약과 제도의 개선만으로는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가 파는 것이 그의 인격이 아닌 노동력일 뿐이듯, 프로야구단이 보유한 것도 선수와 계약할 독점적인 기회일 뿐 그 선수 자체는 아니다.
오늘날 노동자를 소유물로 착각하는 기업들이 생산적인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선수를 자산이나 매물로만 인식하는 프로야구단도 충분한 잠재력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은 되새겨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선수들의 마음을 모으고 그 잠재력을 모두 끌어내 강팀이 되고자 한다면, 그래서 선수를 존중하고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로서의 구단이 되고자 한다면, '영리한 트레이드' 못지않게 '예를 다 하는 트레이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트레이드 과정에서 충분히 협의하면 더욱 좋겠지만, 부득이하다면 최소한 결정된 뒤에라도 몸과 마음을 정리할 며칠의 시간 정도는 주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료나 팬들과 작별할 여유와 생활 기반을 옮기고 준비할 시간 정도는 보장해주어야 한다. 떠난 사람은 떠난 것으로 그만일지 몰라도, 떠나보내는 모습은 남은 이들 마음에 길게 남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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