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묻은 대결김묵 감독의 1960년작 <피 묻은 대결>은 대한권투연맹의 제작 지원을 받아 경기 장면을 제대로 재현한 본격적인 스포츠 영화의 시작이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하며 전문가와 대중을 함께 만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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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공의 영향으로 1960년에 김묵 감독이 연출한 <피 묻은 대결>은 대한권투연맹으로부터 현역 코치의 기술지도와 선수들의 보조출연 지원까지 받으며 경기 장면을 제대로 재현한 '본격적인' 스포츠 영화의 출발점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반항적인 제자(박노식)가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제자를 통해 대신 이루게 하려는 엄한 스승(김승호)과의 긴장관계, 그리고 그 코치의 딸(엄앵란)과의 로맨스 속에서 동양챔피언에 도전하는 여정을 그린 그 영화는 한국 권투의 메카 장충체육관에서 촬영하며 관심을 모았지만 흥행에는 참패하고 말았고, 한동안 스포츠 영화가 제작되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공백기를 지나 한국 스포츠 영화의 명맥을 이은 것은 1966년,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에 오른 김기수를 주연으로 기용해 화제를 모은 김기덕 감독의 <내 주먹을 사라>와 같은 해 최고의 흥행 배우 신성일을 주연으로 기용한 임권택 감독의 <나는 왕이다>였다.
당시 정부가 직접 발탁하고 훈련시키고 기록적인 대전료까지 지불해가며 타이틀전에 올려 챔피언으로 만든 김기수는 국가적 사업의 성과물이었다. 그는 챔피언 벨트를 들고 장충체육관 특별석을 향해 뛰어올라 박정희 대통령과 부둥켜안은 뒤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투의 열풍이 영화계까지 휩쓸었던 것이다.
영화가 가장 먼저 권투를 주목한 이유 중에는 부족했던 제작비와 제작 여건도 있었다. 좁은 사각의 링에서 1대 1로 펼쳐지는 권투 경기의 특성상 출연자 수도 많을 필요가 없었고 촬영 장비도 많이 투입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 실내 촬영으로 해결할 수 있어 더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여건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만화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에서 당시 권투가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박기정 화백이 1964년에 발표한 한국 최초의 스포츠만화 <도전자>는 권투 만화였다.
권투의 뒤를 이어 대중문화와 결합한 스포츠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종목이며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던 축구였다. 1968년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은 한국 최초의 축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신발과 공을 살 돈이 없어 맨발로 헝겊을 기워 만든 공을 차며 연습한 보육원 축구부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실화를 소재로 만든 영화로서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되었고 그 해 전국의 많은 학교에서 단체상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이원복의 <불타는 그라운드>가 생생한 동작 묘사로 축구 경기의 역동적인 장면들을 재현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축구 만화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축구를 영화로 재현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꽤 까다로운 일이었다. 우선 넓은 공간에서 양 팀 22명이 뛰는 모습을 포착하려면 카메라도 많이 동원돼야 하고 편집도 복잡했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팀은 국가대표팀이고, 그 팀의 활약을 그리자면 국제전을 배경으로 해야 했다. 그러자면 해외 촬영까지는 몰라도 외국인 배우 캐스팅 정도는 해야 했는데, 그 모든 것이 제작비 부담을 키우는 요소였다. 그 무렵 제작된 몇 편의 축구 영화들이 대부분 '가난한 어린이들의 고난 극복 스토리'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1970년대, 야구 시대의 개막
야구만화가 등장하는 것은 역시 고교야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1970년대였다. 1971년 이상무 화백의 <주근깨>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이름과 모습을 바꾸고 마운드에 오르는 고교생 이야기인데, 그 소년의 이름이 바로 '독고탁'이었다.
이상무 화백의 후속작 <우정의 마운드>(1976)와 <달려라 꼴찌>(1983) 등에서도 활약한 독고탁은 키도 작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지만 늘 밝은 모습으로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당대의 작고 가난한 소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해준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영웅의 활약은 또 다른 영웅들을 일깨웠고, 1976년 <강속구를 쳐라>를 시작으로 <태풍의 다이아몬드>(1982), <10번 타자>(1982) 등으로 이어진 허영만 화백의 '이강토', 그리고 단행본 120만 부를 판매해 역대 만화책 최다 판매부수 기록을 세운 <공포의 외인구단>(1982)의 '설까치'(혹은 '오혜성') 등 1980년대 한국만화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