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뼉이나 무언가를 두드려서 알려줄 수도 있겠지만 시각 장애인을 비롯한 사람에게는 말이 훨씬 좋다.
김승재
청각
이번엔 시각 장애인의 청력에 관한 잘못된 상식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김치찌개 전문 식당에 갔었다. 본 요리인 찌개가 나오기 전, 맛깔스러운 밑반찬 예닐곱 개가 양은 그릇에 담겨 나왔다. 본 요리인 찌개는 물론 밥공기도, 개인용 앞 접시도 모두 양은으로 만든 것이어서 꽤 인상적인 곳이었다.
"야, 반찬이 다 맛있구나."
한 친구가 내 손을 잡고 반찬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종류를 말해 줬다. 난 그럴 때마다 하나씩 맛을 보고 반찬 위치를 대충 기억해 뒀다. 그런데 커다란 찌개 냄비가 나오면서 모든 반찬 그릇의 위치도 변해 버렸다.
"계란말이가 어딨더라?"
모든 반찬 그릇의 위치가 바뀐 탓에 난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찾지 못하고 그냥 허공에 젓가락만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종이 울렸다.
땅땅.
불이 난 것도 아니고, 무슨 공격 명령을 내릴 것도 아닌데, 정말 너무 크게 반찬 그릇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계란말이가 든 양은 그릇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던 친구는 더욱 크게 그리고 좀 더 빨리 그릇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땅땅땅땅땅땅땅땅.
식당 안이 온통 그릇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찬 것만 같았고, 모든 사람이 앞 못 보는 날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넘어 약간의 모멸감까지 밀려왔고, 계란말이의 위치를 알아차리기는커녕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악의가 있던 것도, 실제 큰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근데 난 창피하단 생각에 더해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멀쩡한 입으로 말을 하거나, 처음 친구가 한 것처럼 가볍게 내 손을 가져다주면 될 텐데, 무슨 동물한테 밥 주는 것도 아니고.
청각이 시각을 대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가 있고, 정도가 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양은 그릇을 그렇게 크게 두드리면 좁은 공간에 소리가 울려서 오히려 찾기가 더 어렵다. 말로 할 수 있다면 말이 훨씬 좋고, 손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시각 장애인의 청각과 후각이 예민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만능이 되는 건 아니다. 말로 할 수 있는데, 조련사가 동물 부르듯 손뼉을 치거나 물건이나 그 주변을 두드려서 소리로 알려주는 건 솔직히 무시당하는 기분이다.
또 한 가지. 대화할 때 우리가 상대방 뜻을 알아듣는 데는 당연히 말이 큰 역할을 하겠지만, 표정과 몸짓 그리고 상대의 눈빛도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나 같은 시각 장애인은 시끄러운 공간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기가 더 어렵다. 말하는 이의 입 모양도, 표정도 눈빛도 볼 수 없기에 말하는 이의 소리도 주변의 소음 중 하나일 뿐이다.
주변이 말소리가 듣기 어려울 정도로 시끄럽거나 지나치게 울리는 곳이라면 시각 장애인에게는 좀 더 신경을 써서 말해주면 정말 너무너무 고맙겠다.
그리고 청각은 나머지 세 개의 감각, 그러니까 후각·미각·촉각보다도 압도적으로 시각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자판을 두드려서 맘껏 수다를 떨 수 있는 것도 화면의 모든 글자를 음성 프로그램이 읽어주기 때문이고, 내가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나를 둘러싼 소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각을 통해 시각을 대신하고 있을 때, 갑자기 끼어드는 다른 소음은 마치 눈앞에 끼어드는 방해물과 같다. 시각 장애인이 음성 프로그램이나 스마트폰의 음성 인식 시스템을 이용해 뭔가를 하고 있는데, 말을 걸거나 크게 음악을 틀어 놓는 것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컴퓨터를 쓰고 있는데 모니터 화면을 손으로 가린 것이고 영화를 보고 있는데 그 화면 앞을 알짱거리는 것과 같다.
가능하다면 뭔가를 듣고 있는 시각 장애인에게는 먼저 의사를 표시한 후 그가 눈길을 돌렸을 때 이야기하고, 근처에서는 큰 소음을 자제해 주면 고맙겠다.
본의 아니게 또 투정을 부린 것 같아 쑥스럽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정말 이런 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 상식 취급도 못 받는 것 같다. 다음에는 반대로 내 가상의 눈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과 입이 어떻게 나 같은 시각 장애인을 미술관에 가게 하고, 멋진 경치를 보게 하고, 영화를 보게 하는지 말하려 한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덩달아 막걸리 생각도 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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