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시러큐스의 오논다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열린 반도체산업육성법(CHIPS) 제조 행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미국에는 윗사람이 알아서 배려하고 챙겨주는 그런 위계질서 전통이 아주 약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교주의적 사대란 개념과 전통도 없다. 사대는 굴종적이고 비굴한 태도나 사고로 번역돼 오히려 비판적인 시각이 더 강하다. 일상에서도 상대가 요구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챙겨주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오지랖 넓은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즉, 강대국 미국이 약한 동맹국 한국을 먼저 배려하고 알아서 챙겨주는 그런 일은 미국식 사회 관념과는 사실 거리가 멀다. 한국이 먼저 주도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요구해야 국익 증진에 더 도움이 되는 이유다. 이는 미국 국내 정치에서 한국의 정치적 위상이 아직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미국 국내 정치에서 한국은 중요한 나라가 아니다. 한국, 나아가 한반도 문제가 선거에서 득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높은 유권자 수가 적다.
2020년 미국 인구조사에 의하면 아시아계는 전체 인구의 6%가 채 되지 않는다. 이 중 시민권을 가진 18세 이상의 선거 가능 한인교포(혼혈 포함)의 숫자는 약 122만 명으로 미국 전체 유권자의 0.5%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한인들은 거주지역이 편중되어 있다. L.A., 뉴욕, 시카고, 워싱턴 근교 등 일부 대도시에 집중해 거주한다.
미 민주당이나 공화당 입장에선 전국 단위 선거 승리를 위해 아시아계나 한인 유권자의 표심에 호소해야 할 동기요인이 약한 것이다. 특히 한반도 정책의 변화를 주도해 유권자들의 표심에 호소해야 할 동기요인은 더더욱 약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냉전 시기부터 고착되어 온 국가안보 중심 군사전략이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 외교정책을 압도한다. 국방부와 중앙정보국(CIA) 등 군사 및 정보관련 정부조직들이 한반도 관련 정책을 주도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조직들이 기본적으로 현상유지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적'과 '아'를 분명히 하며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모든 주요 사안들을 국가 안보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전략적 선명성'이 이들 조직의 화두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로 상생하거나 평화적으로 상호의존하는 관계보다는 적대적 공생관계 구축에 익숙하다. 따라서 국가 간 협력이나 협상의 가능성을 미리부터 배제하고 분쟁과 갈등의 상황 대비 전략에 몰두하곤 한다.
한국에서 최근 문제가 된 미국의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도 그 기원은 이들 군사 및 정보 조직의 문제제기였다. 미 국방부는 2001년 9.11 이후 국가안보상의 취약성에 대해 대대적인 점검을 실시했는데 이때 첨단 무기제작에 필요한 반도체 조달에서 취약성 문제가 제기됐다. 대부분을 해외 업체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4년부터 '신뢰가능한 위탁생산 프로그램'을 통해 첨단 무기제작에 필요한 반도체를 조달해 왔다. 하지만 실적이 저조했다. 매년 국방부 반도체 구매량의 2%(19억 달러) 정도만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조달됐다. 그러는 사이 첨단무기 생산에 쓰이는 10나노미터 미만의 초정밀 반도체는 대만 TSMC(92%)와 삼성(8%)으로부터 전량 수입하게 됐던 것이다.
트럼프와 바이든 본질은 같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 의회는 2020년 '반도체 생산 촉진법'을 발의하고, 국방수권법의 반도체 관련 조항을 통해 미국 내 10나노 미만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를 도모해 왔다. 대만이나 한반도에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해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미 국가안보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7월에 상하원을 통과한 '반도체 산업 진흥법'은 이런 노력의 결과다. 특히 바이든 정부가 제안한 반도체 '칩4 동맹'은 미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기반을 확충하고 한국, 대만, 일본의 대중국 첨단 반도체 수출과 기술유출도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전략이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우선적으로 미국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반도체 소재 부문이다. 반도체 기초원료 품목에서 전세계 공급망은 여전히 중국 의존도가 높다. 이 기초원료 생산은 단기간에 새로운 대체 시장으로 전환하기가 어렵다. 그 전환 과정에서 특히 중국의 생산 점유율이 높은 갈륨(95.7%), 텅스텐(83.6%), 마그네슘(82.0%) 등이 우선적인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다.
또한 반도체 공급망은 설계, 소재, 장비 등 전 생산과정에 걸쳐 국제분업 수준이 높아 공급망 재편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전환의 과정에서 미국의 전략이 한국의 국익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현재 한국 반도체 수출의 60% 이상, 무역흑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1993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 전체 무역흑자의 86%가 중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했다. 게다가 중국은 전 세계 반도체 소비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추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시장이다. 만약에 중국 측이 경제 보복이라도 한다면 중장기적으로는 이 큰 시장을 모두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요청대로 우리나라가 '칩4동맹'에 적극 참여해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이 중국 기업들에 대해 초격차 기술을 유지한다면 중국이 반도체 분야에 대해 직접 제재나 보복을 가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국가경제 전체적으로 중국 시장에서 발생한 손해를 미국에서 만회할 수 있느냐다. 임기응변식 대응이 아니라 중장기 전략에 기초해 사안에 따라 실용적으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유능한 외교가 더욱 긴요한 상황이다.
향후 미국의 대중국 봉쇄정책은 모든 부문에서 더욱 강력하게 추진될 것이다.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과 기술 및 산업, 보호무역주의도 더욱 공세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핵심 원인은 미국 내부 문제 때문이다. 미국이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저소득, 저학력 백인계층이 유권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정도(44~51%)나 된다. 이들 저학력 백인 저소득층은 제조업 공동화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정권 획득과 유지를 위해서는 이들을 위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바이든 정부의 가치외교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고 도구인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바이든 정부의 '중산층을 위한 외교'는 본질적으로 같은 정책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 잠재능력에 자신감 가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