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의 전시회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뉴욕에서 열린 이 첫번째 전시회는 대성황이었다.
이하제공
전시회가 끝날 무렵 루마니아 난민인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그는 이하에게 차우셰스쿠 때문에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조국을 등져 뉴욕 거리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연을 들려줬다. 전시장을 나서며 "차우셰스쿠도 그려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세상이 자기 가족의 고통을 알아주고 이하의 그림을 통해 독재자가 고발되길 원했다.
이하는 전시회 일정에 쫒기는 바람에 시선을 끌 수 있는 소재로 독재자를 그렸을 뿐이었는데 당황했다. 루마니아인과 더듬더듬 영어로 얘기를 나눴지만 그는 "내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하에겐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그때 세상이 원하는 그림, 시대가 바라는 이미지를 위해서 살겠다, 라는 마음이 싹 텄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땅 어디든 그림판으로 삼아 뉴욕의 예술가처럼 길바닥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키웠다. 그 마음이 처음으로 표현된 게 바로 이명박 그림이었다.
2010년부터 거리의 화가 노릇을 하며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른 이하는 어떻게 먹고 살며 작품 활동을 이어온 걸까? 서울 정릉에 있는 작업실 겸 살림집 월세만 해도 65만 원이다. 재료값도 적지 않게 들 터인데.
다행히 그에게 빼어난 재주가 있었으니 바로 용접이다. 경희대 조소과 대학원을 다닐 때 석고나 철을 깎고 이어붙이다 보니 끌이나 망치는 기본이고 용접 또한 익혀야 했다. 돈이 필요하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서 용접 일당을 뛰었다.
용접 일은 하루종일 쪼그려 앉아서 하는 데다가 불볕더위에도 방호복을 입고 2000도 가까운 열기를 받으니 체력소모가 많았다. 그나마 경찰에 불려 다니고 재판에 나가다 보니 제대로 뛰기도 어려웠다.
요즘에는 술집이나 식당의 인테리어 일을 틈틈이 도와준다. 그 외, 그의 그림으로 만든 머그컵이나 액자 같은 소품을 쇼핑몰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 조금씩 팔고 있다. 그래봐야 푼돈. 고정수입은 7명의 후원회원이 매달 10만 원씩 70만 원을 모아준다. 이름하여 '이하기금'. 대신 그는 후원회원들에게 석 달에 한 번씩 그림으로 보답을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 2탄 준비
경찰 조사를 마친 이하에게 남은 건 검찰조사, 용산 대통령실의 하명수사가 분명하니 검찰이 어떻게든 기소를 할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하는 지금 2탄을 준비 중이다.
1탄의 그림이 윤석열과 김건희를 공동주연으로 했다면 2탄에는 법사가 우정 출연하고 새마을기와 일장기가 소품으로 등장한다. 이미지는 완성되었고 이번에는 조명을 곁들여 연출할 작정이다. 이를 위해선 약간의 군자금이 필요한데 11월경 '목돈'이 들어올 예정이어서 그때를 준비하고 있다.
이하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게 '옥외광고물법'과 '경범죄처벌법'이다. 그의 그림 어디에도 상호나 상표가 없다. 물론 상품도 없다. 돈을 벌려고 그림을 붙인 게 아닌데 광고물법으로 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설령 옥외광고물법에 저촉되더라도 어찌 이 법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막으려 한단 말인가?
경범죄처벌법도 마찬가지다. 그가 골목길에 소피를 본 것도 아니고 술 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다. 경범죄를 끌어다 예술과 창작을 옥죈다면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 아닌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엔 저항하는 예술가를 탄압할 때 반공법이나 국보법을 휘둘렀다. 지금은 차마 이적표현물이란 조항을 적용할 수 없어서일까, 너무 좀스럽고 구질구질하게 법기술을 부리고 있다.
이하는 길바닥 화가로 살아오면서 연행되고 불려 나가고 여섯 번이나 기소되었다. 심리와 판결을 받느라 법정에 선 건 수십 번. 창작에 몰두하기에도 벅찬 데 심신이 피로했다.
더욱 괴로웠던 것은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의 공격, 이들 시위에서 어느 날부터 이하는 공적이었다. 어떻게 핸드폰 번호를 알았는지 상상할 수 없는 욕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민중미술의 선배로부터 이어받은 저항정신으로 버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