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외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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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영(woodway)등록 2022.10.20 16:53
정암 조광조 선생을 따라 낙향한 효령대군 7대손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18대손인 송은(松垠) 이양률(李良律)(1898~1980, 보명은 강복(康馥)) 선생은 내게는 외조부님이 되시는 분이다. 송은 선생의 가승보(家承譜) 기록에 의하면 외가 가문은 7대손인 훈포(訓圃) 이원백(李元伯) 할아버지께서 정암 조광조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기묘사화로 낙향하신 후 강진에서 종신하자 후손들이 전남 해남군 북일면 용일리 정포산에 선산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효령대군 7대손 이원백 할아버지의 묘소 전남 해남군 북일면 용일리 정포산 선영에 안면하신 이원백 할아버지 ⓒ 신남영

 
한학과 기독교의 만남

큰외삼촌이신 19대손 유파(柚坡) 이반석 선생의 회고록에 의하면 외조부님은 해남 부호인 윤씨 가문의 윤창엽(尹蒼葉)씨와 결혼하셨는데 부인이 첫 딸을 낳고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속현(續絃)으로 내게는 외할머니 되시는 최광석(1904~1979)을 맞이하여 밤낮으로 한학 공부만 하고 있으니 외할머니께서 농사일을 도맡아서 역부족인데다 식구는 날로 불어 항상 가난 속에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큰외삼촌이 보통학교 때  중부댁에 가고 동생은 큰백부님께 맡겨져 두 형제가 보통학교를 서럽게 마치자 외할머니께서는 쌀로 과자를 만들어 청산, 노화도 섬 등을 돌며 장사를 하며 힘들게 사셨다 한다. 생전에 외할머니께서는 그 때의 일을 회고하시면서 몇 번이고 바다에 빠져 죽을 결심을 했으나 큰외삼촌의 또록또록한 눈동자가 눈앞에 어른거려 차마 죽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1942년 흉년을 피해 만주 봉천으로 이주한 외가
 
그렇게 전남 해남군 용일리 동각 서당에 임시 거주하다가 그곳에서 큰집 덕택에 소작 9두락(200평)을 지으며 겨우 살았는데 임오년(1942년) 흉년에 식량은 떨어지고 너무 힘들어 당시 열아홉살의 큰외삼촌께서는 식구들 아홉명이 여기서 쓰러지기 전에 만주로 떠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옛 봉천(지금의 선양)의 거리 풍경 1942년 임오년에 외가는 흉년을 피해 만주 봉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 김지환

 
만주에 도착한 큰외삼촌은 남순 이모를 통해 봉천(지금의 선양)의 방재옥씨 집을 찾아가 판자로 이층에 집을 짓고 살며 제병공장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중노동이지만 하루 임금이 쌀 4되, 야근까지 해서 도합 8되를 받고 가운데 동생도 쌀 2되를 벌고 외할머니께서도 마차를 타고다니며 콩기름 장사를 해서 쌀 두 세 되를 벌어 그렇게 온 식구들이 일을 하여 일년만에 영신구로 옮겨 집을 사게 될 정도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하자 외조부님은 절대로 고향엔 아니 가시겠다고 했지만 큰외삼촌이 판단하기에 소련군은 진주해 오고 봉천을 벗어나야만 하는 극한 상황이 되자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든 것을 잃고 결국 전주이씨 제각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제각집에서 6.25 사변을 겪었지만 가진 것도 없고 기독교신자란 명분이 확실해 가족이 죽음을 면했으나 그 제각집에서 이옥순과 이장욱 두 남매를 홍역으로 잃었다고 한다.

 

송은 이양률 선생의 남은 자녀들 왼쪽부터 이정렬, 위로 이상환, 아래로 이화엽, 이대전 ⓒ 신남영

 
외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이유는

내가 늦게나마 사서삼경을 공부하게 되면서 외조부님이 더욱 그리워졌다. 또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옛사람들의 사유 체계가 궁금해졌다. 그 의식의 발전적 계승을 통해 삶의 지표를 설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큰 외삼촌도 말씀하셨듯이 도무지 살림에는 무관심한 외할아버지의 고지식함과 현실적인 융통성 없음이 외할머니와 외삼촌들 고생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후생들이 마땅히 극복해야 할 것이지만, 학문에 대한 그 청고한 기품과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선견지명은 늘 살아있는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외가의 역사를 기록해두는 것은 단순히 잊혀져가는 것을 복원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삶에 대한 거울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명멸해간 삶들을 되돌아보면 늘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아쉬움을 주는 삶들이 많다. 

주경야독이란 말이 있듯이 진정한 실천적 지성인이란 관념이 아니라 삶과 일체를 이루는 정신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가 후생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은 외조부님의 학문에 대한 변함없는 집념과 외할머니처럼 몸소 행함으로써 모범을 보여주는 신앙인의 자세나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책임을 다하려했던 큰외삼촌의 굳센 의지 같은 것이다.
 

송은 선생의 비문시 송은 선생은 가승보에 비문시를 남겨 놓으셨다. ⓒ 신남영

 
비문시를 통해 시의 길을 걷다

오래전에 송은 선생의 묘비에서 비문시(碑文詩)를 본 후 깊은 감흥을 받고 남기신 시집을 수소문하여 찾고 그 중 몇 편을 해석하여 외삼촌들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다. 사실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더 다짐했던 계기는 그분의 비문시를 처음 보고난 후였을 것이다. 

내 선조 중에 시를 쓰신 분이 계셨다는 사실은 내게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했고 그 유산을 계승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결국 그 비문시를 통해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시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내가 그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이 내 정체성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臥靑山莎(와청산사)

閑離俗世臥靈柩(한리속세와영구)
氣滿靑山莎屋眠(기만청산사옥면)
復活將開奇妙理(부활장개기묘리)
寂遊魄骨甦弘恩(적유백골소홍은)

청산 잔디집에 누워

한가로이 속세를 떠나 몸을 누이고
기운 가득한 청산 잔디집에 잠을 자려네
장차 부활의 날에 기묘한 이치로 무덤이 열리면
외로이 떠돌던 넋은 큰 은혜로 다시 깨어나겠네

송은 선생의 비문시는 삶에 관한 자연의 섭리와 부활의 신앙과 소망을 노래한 시편이다. 유훈시로 남기신 '인생본의'도 자손들에게 믿음의 길을 대대로 벗어나지 말라는 신앙인으로서의 간곡한 당부를 초서로 남기신 시편이다.

 

송은 선생의 친필 유훈시 자손들에게 유훈으로 남기신 시 ⓒ 신남영

 


영광스럽게도 외조부님의 귀중한 유훈시와 비문시를 정포산 선영에 건립하는 일에 미력하나마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귀하고 뜻깊은 자리에 후손들이 모여 고인의 유지를 되새기고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족의 모습에 자손들을 사랑하셨던 두 분도 크게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한학자이자 시인이셨던 외조부님은 염결한 선비정신과 시인의 기운을 물려주셨고 외할머니는 독실한 신앙과 무한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남겨주셨다. 우리는 부모 세대의 간난신고의 희생 위에서 제각기 후생으로서 또 다른 후생을 뒷바라지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처럼 선조들도 그래왔을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인 외가

유훈시비 제막식을 마치고 유훈시비 앞에 선 자손들 ⓒ 신남영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다녀올 때 외할머니께서 터미널까지 따라오셔서 내 손에 지폐 몇 장을 꼭 쥐어주며 배웅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외삼촌들과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외할머니의 독실한 신앙은 어머니의 신앙과 함께 우리 형제들과 가족의 믿음의 뿌리가 되고 있다.

후생들이 있는 한 가문의 역사는 계속 흘러갈 것이다. 살아온 자는 살아갈 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간다. 뿌리 깊은 나무가 고난의 바람을 견디는 것처럼 내게 있어 외가는 흔들림 없이 가야할 신앙과 시의 반석이자 뿌리인 것이다.   
 

외조부님, 외할머니 사진 외조부님과 외할머니는 내게 있어 시와 신앙의 뿌리이다. ⓒ 신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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