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바리 이정훈2차 지명을 통해 배출된 최초의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을 이정훈의 별명은 '악바리'다. 2년 연속 타격왕에 오르며 팀을 강팀으로 이끈 그가 품었던 '악'의 일부는 1차 지명에서 밀려나며 타향 팀으로 가야 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1차 지명보다 2차 지명에서 더 많은 스타들이 배출되는 시대가 열렸고, 더 이상 2차 지명자라는 이유로 '악'에 받칠 이유도 없어졌다.
한화 이글스
전문스카우트의 등장
이정훈은 노골적으로 '드러난 보석'이었기에 극적인 쟁탈전이 필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흙 속에 '숨겨진 진주'를 찾는 일이었다. 이제 각 구단은 연고 지역 출신 선수들 중 가장 뛰어난 3명을 골라내기 위해 치밀한 분석을 해야 했고, 이전까지 다른 구단이 버리거나 흘린 선수들 중에서 아쉬운 대로 골라서 쓰는 '이삭줍기터'였던 2차 지명 역시 제대로만 고르면 월척은 몰라도 준척은 낚을 수 있는 해 볼 만한 '낚시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각 구단이 스카우트 부문을 강화하고 선수들에 대한 관찰과 분석에 나선 것은 당연했다. 1987년 OB 베어스가 KBO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의 분류 작업을 담당하던 강남규를 영입해 선발 업무를 맡긴 것이 한국 야구 전문스카우트 역사의 시작이었다.
강남규는 휘문고에 다니던 1958년 서울공고를 상대로 국내 최초의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투수였고, 나중에 베어스의 수석 코치를 지냈다. 프로 첫해부터 MBC와 서울을 연고지로 공유하면서 선수도 경쟁적으로 선발해야 했던 OB가 가장 먼저 스카우트 분야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1989년 서울 지역 신인 지명에서 OB 베어스가 당시 대학 최고의 투수로 꼽히던 건국대의 김기범 대신 성균관대 이진을 선택하는 뜻밖의 결정을 내린 것도 전문 스카우트의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인데, 하필 그 의욕적인 첫걸음이 영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기범이 1990년대 LG 최강의 계투 요원으로 11년간 활약하며 통산 62승 그리고 승수로 다 표현되지 않는 엄청난 기여를 해준 반면 OB의 이진은 4년간 10승을 기록한 데 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카우트 전문화의 필요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다른 구단들도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88년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스카우트 전담팀을 설치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갔고 1989년부터는 다른 팀들도 스카우트 업무만 전담하는 인력과 부서를 설치했다. 대학과 고교 팀들의 경기 현장에 프로팀 직원들이 상주하며 뭔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풍경은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어쨌든 그 이후로 2차 지명을 통해 선발된 선수 중에도 굵직한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87년에 이정훈을 놓친 청보의 2차 지명자 중에는 2년 뒤 연고지 인천에 첫 가을야구의 경험을 선물한 최창호가 들어있었고, 1988년에는 롯데가 김응국을, OB가 미래의 명감독 김태형을 건졌으며, 1989년에는 정명원, 이종운, 이명수 등이 2차 지명을 통해 프로에 입문했다. 90년대 후반 이후로는 1차 지명보다 2차 지명에서 더 훌륭한 선수들이 배출되는 일이 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