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미의 모습남편 강동완과 최강유랑단을 꾸렸다.
민병래
강동완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향토기업인 청룡건설에 재직할 때, 1군이었던 대산건설 출신이라고 30대 후반에 업무부장을 맡아 차량과 법인카드를 제공 받았다.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뛰었다. 계약되면 좋아서 한 잔, 못 따내면 열 받아서 한 잔. 집은 하숙이고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다녀오세요"가 고작이었다.
건설회사 영업직 시원으로 5년이 넘어가던 어느 날 최윤미는 강동완에게 종이를 건네며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적어보라고 했다. 가정과 남편을 위해서 멈춤이 필요했다. 잘 살고 있는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최윤미는 생활 수준과 소비를 줄이더라도 '이타적인 삶을 살아보자'고 제안했다. 아내의 권유에 남편 강동완은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놀이의 스승을 찾아서
사회복지사 2급을 따 예산군 요양원에서 일하며 강동완은 "봉사하며 살자"는 다짐대로 신양초등학교 학부모회장을 맡았다. '신양놀이문화마을'이라는 공동체를 만들며 놀이품앗이에 나섰다. 아이들에게 공기놀이, 잣치기, 비석치기를 알려주고 함께 놀았다. 재밌고 보람 있었다.
그런데 전래놀이 몇 가지로 아이들에게 충분할까? 금세 싫증나지 않을까? 요즘 시대에 맞는 새로운 놀이는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침 '참교육 학부모연대'가 서울 성북구청에서 놀이 강습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무작정 올라갔다. 세 시간 수업을 받고 예산으로 내려오는데 알 듯 모를 듯했다.
그는 편해문의 '우리 이렇게 놀아요'를, 이상호의 '전래놀이 101가지'를 정독했다. 읽기만으론 잘 다가오지 않았다. 강동완은 충주에 사는 이상호 선생을 직접 찾아가 저자 사인을 받고 이해 안 된 부분을 물었다. 이상호는 강동완에게 놀이인생에서 만난 첫 번째 스승이 되었다.
그 다음은 아이들! 신양면은 학원이 없기에 학교수업이 일찍 끝나는 수요일이면 놀이판을 벌여 이상호 선생에게 배운 걸 펼쳐 보였다. 아이들은 동반자이자 스승이 되었다. 전래놀이 하나하나, 잊힌 우리 놀이를 한 가지씩 마을에 전해나갔다. 그리곤 어느 순간 강동완은 '놀이'에 인생을 걸게 되었다.
늦은 점심을 푸짐하게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부부는 10월 일정을 점검했다. 보령시 일정이 많다. 송학초, 관창초, 남포초 등등. 많은 일정 중에서도 최윤미·강동완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섬마을 분교에 들어가는 날을 꼭 챙긴다.
바다를 가르는 뱃길도 좋지만 분교의 아이들은 고작 대여섯명, 이들에게 노리카는 특별한 손님이고 진기한 경험이다. 방문 일정은 충남교육청의 협조를 받지만 엄연히 부부의 재능기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