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론 우즈메이저리그에서 뛴 경험이 전혀 없었던 우즈는 당초 많은 주목을 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성공하겠다는 절실함을 감지한 OB 베어스에 지명되었고,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한 명으로 남게 됐다. 한국에서 5년간 174홈런 510타점을 기록한 뒤 일본에서 다시 6년간 뛰면서 그 이상의 활약을 했다.
두산 베어스
게다가 1990년대 들어서는 재일교포 선수들의 효용이 줄어드는 문제도 더해졌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의 가치가 치솟으면서 촉발한 일본 경제의 거품은 한국 프로야구단들이 더 이상 김일융이나 장명부 같은 수준급 재일교포 선수들의 몸값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고, 반대로 창설 후 몇 년 사이에 빠르게 발전한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은 이제 일본에서 주전이 되지 못한 선수들이라면 한국에서도 버텨내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 구단들이 선수를 뽑을 수 있는 통로는 8개 구단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드래프트 뿐이었고, 그런 환경은 모기업의 자금력이 가장 빈약했던 해태 타이거즈가 '광주의 물가는 서울보다 30%쯤 낮다'는 명분으로 선수들의 연봉 역시 30%쯤 후려치는 억지를 감행하면서도 리그 우승을 휩쓰는 데 별 문제가 없었던 배경이 되고 있었다. 돈을 써서라도 성적을 끌어올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그룹 총수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애가 타던 대기업 계열 구단들이 일찍부터 '외국인 선수를 뽑게 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인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판을 흔들 필요가 없던 해태 타이거즈나 어차피 약팀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돈의 요소가 개입된다면 더욱 불리해질 것이 뻔한 쌍방울 같은 구단들이 동의하지 않은 것도 물론이었다. KBO 사무국 역시 소극적인 입장이었는데, 창설 당시부터 지상과제로 삼다시피 해온 '전력의 평준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명분 외에 당장 일자리 감소를 걱정해야 할 고교야구팀들을 비롯한 아마추어 야구계의 반발을 무마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안건은 199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상정되었지만 매번 분분한 논쟁 끝에 보류되곤 했다.
현대의 프로야구 참여와 박찬호의 미국 진출이 불러온 변화
하지만 1993년부터 1996년 사이에 몇 가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1995년 9월, 끈질기게 프로야구 참가를 시도하던 현대가 결국 태평양 돌핀스를 매입해 KBO 이사회에 진입했다. 당시 야구에 대한 현대그룹의 열정은 무지막지했다. 프로팀 창단 의향이 기존 구단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아예 '제 2리그 창설'을 공언하며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창단해 프로팀 제시액의 두세 배에 이르는 거액을 안겨주어 아마추어 유망주들을 싹쓸이했을 정도였다. 그런 현대가 대표적인 '짠돌이 구단' 태평양을 대신해 KBO 이사회에 참가하면서 반대표 하나가 찬성표로 뒤집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상황의 변화는 1993년에 한양대 2학년생 투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 입단한 데서 비롯되었다. 유학비자를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최동원과 선동열을 비롯한 많은 선배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가로막았던 병역 문제를 우회하고 미국의 프로구단에 입단하는 데 성공한 박찬호가 이듬해인 1994년에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자 자극을 받은 적지 않은 고교야구의 정상급 선수들이 국내 프로구단들의 지명을 거부하고 해외로 직접 도전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1994년 7월 경희대를 졸업한 외야수 최경환이 자신을 지명한 LG 트윈스 입단을 거부한 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와 계약을 맺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중앙대의 3학년생 투수 최창양이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했다. 두 선수 모두 고교와 대학 무대에서 정상급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아니었고, 박찬호에 버금가는 가능성을 인정받을 만큼의 특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두 선수 모두 계약금의 규모는 박찬호의 1/10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국내 구단들의 위기감은 더욱 클 수 있었다. 해외 리그에 빼앗길 수 있는 선수들의 규모가 메이저리그 승격을 기대할 수 있는 극소수의 정상급 선수들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급 선수들도 움직였다. 1995년 말에는 역대 가장 많은 유망주들이 배출되었다는 92학번들이 대학 졸업을 앞두게 됐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은 임선동과 조성민이 나란히 일본 프로팀과 계약을 맺었고 차명주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도 메이저리그 입단을 타진한다는 소식이 퍼졌다. 해외진출이라는 대안이 생긴 선수들이 국내 구단들과의 입단계약 협상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호락호락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런 배경 위에서 1996년 11월 27일에 열린 이사회에서 외국인 선수 선발을 허용하자는 안건이 가결되었다. '경기력 향상을 통한 팬서비스의 확대'를 주장한 삼성, 현대, LG의 목소리가 해태와 쌍방울을 압도했고, 다른 구단들 역시 외국인 선수 영입으로 인한 지출 증가폭보다는 국내 선수들의 해외 유출로 인한 '품귀현상'에 따른 인건비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더욱 클 것이라는 계산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수의 등장이 불러온 변화
1997년 11월 미국 플로리다의 세인트피터스버그에서 트라이아웃 캠프에 쌍방울을 제외한 7개 구단과 54명의 선수들이 참가했고, 평가전과 면접을 거쳐 좋은 인상을 남긴 12명의 선수들이 계약에 성공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현대와 삼성, OB, 한화가 각각 두 명씩의 선수와 무사히 계약을 맺었고 투수 빅터 콜과의 계약이 결렬된 롯데가 덕 브래디 한 명만을 입단시켰다.
그리고 충분한 계약금도 준비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참가했던 해태는 왼손잡이 외야수 숀 헤어를 지명하고도 무성의한 협상 끝에 빈 손으로 귀국했지만 시즌 중 팀이 최하위권으로 추락하며 이종범을 일본에 보낸 데 대한 비난이 비등해지자 뒤늦게 계약을 성사시키고 데려오기도 했다. LG도 그 해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선수들 중 가장 화려한 메이저리그 경력을 가지고 있던 주니어 펠릭스와 연봉 수준에 합의하지 못했다가 8월에야 뒤늦게 합류시키면서 2명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한 팀이 됐다.
그 12명의 선수들이 모두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다음 시즌 재계약에 성공한 것은 단 3명(OB의 우즈와 캐세레스, LG의 주니어 펠릭스)에 불과했고, 구단에서 재계약을 희망했지만 거부한 현대의 스캇 쿨바를 포함하더라도 '성공작'이었다고 할 만한 선수는 네댓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충격은 작지 않았다. OB의 우즈가 잠실을 홈구장으로 쓰면서도 42개의 홈런을 기록해 한동안은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여겨지던 장종훈의 시즌 41홈런 기록을 훌쩍 넘겨버린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쿨바도 .317의 정확한 타격에 더해 26홈런과 97타점을 기록하는 정상급 활약을 했고 뒤늦게 합류한 주니어 펠릭스도 33경기만을 뛰면서도 6홈런과 21타점을 기록해 그 못지않은 능력을 과시했다.
우즈와 호세, 로마이어와 데이비스
물론 해가 갈수록 한국 무대를 밟는 외국인 선수들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고, 그들의 활약에 따라 팀의 성적이 좌우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외국인 선발 2년차인 1999년에 두산의 우즈가 34홈런 101타점으로 여전한 활약을 이어간 데 더해 현대의 피어슨이 31홈런 108타점, 삼성의 스미스가 40홈런 98타점으로 그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