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31일 정의기억연대 주최로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부근에서 열린 제1559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한 일본 단체 콜라보(Colabo) 회원들이 동시통역기를 귀에 꽂은 채 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에도 그랬고 2015년 위안부 합의 때도 그랬고, 일본 정부는 한국 국민들이 명확히 반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국 정부를 합의 체결로 유도했다. 대한민국 주권자들이 명확히 거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합의를 유도한 일본 정부가 합의 파기를 이유로 신뢰관계를 운운할 수 있는지 따져보게 된다.
한덕수 총리가 말한 국가 간의 신뢰는 일차적으로 국민과 정부의 신뢰에 기초한다. 국민들이 명확히 반대하지 않은 사안을 내용으로 정부는 외국과 계약을 체결하고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명확히 반대하는데도 외국과의 합의 체결을 강행했다면, 이런 합의가 파기된 것을 두고 신뢰관계 파탄을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이른바 '1965년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일기본조약과 그 부속협정인 청구권협정·재일교포협정·어업협정·문화재협정 등으로 구성된 이 체제는 '식민지배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지 않으면서 국교파탄 상태를 복구했다'는 특징을 띠고 있다.
2015년 위안부 합의는 공식 사과 및 배상 없이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다. 또 일본 정부가 제공한 금전을 제3자인 한국 재단이 배상금이 아닌 지원금 명목으로 피해자에게 지급하도록 했다. 일본 정부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봉합했다는 점에서 1965년 체제의 특징이 위안부 합의에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이 합의의 기초가 된 1965년 체제는 한국 국민들의 명확한 반대 속에서 강행됐다. 이는 1964년 6·3운동 혹은 6·3사태로도 표현되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 투쟁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대응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서 박정희 하야 구호가 등장한 1964년 6월 3일, 박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발포했다. 박 정권은 이것으로도 상황이 진정되지 않자, 협정 체결 2개월 뒤인 1965년 8월 26일 서울 지역 위수령을 발포했다. 경찰 병력으로는 시위를 막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육군 병력까지 서울에 투입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국민들이 명확히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독재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속에서 1965년 체제가 등장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을 훤히 지켜보면서도 한국 정부를 부추겨 합의 체결로 이끌었다.
1965년 체제의 이 같은 생성 과정은 거기서 생겨난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은 물론이고 위안부 합의 같은 것이 과연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한국 국민과 한국 정부 간의 신뢰관계가 파탄된 상태에서 체결된 1965년 체제가 한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구속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한국 국민들이 반대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과 합의를 체결한 경우라면, 뒤늦게 이를 파기한 행위에 대해 신뢰관계를 이유로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이 극렬히 저항하는 속에서 체결된 1965년 체제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위안부 합의를 깬 것은 신뢰를 깬 것이라는 한덕수 총리의 발언은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김종필의 뒤늦은 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