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한 8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고 배춘희 할머니를 비롯해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2021.1.8
연합뉴스
배춘희 사건에서 지난 15일 각하 결정이 난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 내 일본 재산을 찾아내기 위한 재산 명시 절차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상의무를 불이행하는 채무자에게 재산 목록 제출을 요구하는 이 절차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절차를 위한 재산 명시 기일이 지난 3월 21일로 예정돼 있었지만 무산됐다. 우리 법원이 보낸 서류를 일본 정부가 수령하지 않은 결과다. 서류가 도착한 그 순간만큼은 일본 정부가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로 인한 불송달로 인해 일본 정부가 3월 21일 출석하지 않아 재산명시기일의 절차가 열리지 못했던 것이다.
3월 21일 '노쇼'한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서류 수령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럴 때마다 일본 정부는 빈집처럼 되고 일본 정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법적·관념적으로 조성된다. 이 때문에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이 '주소 불명'을 이유로 원고의 재산 명시 신청에 대한 각하 결정을 내린 것이다.
'국가면제' 내세우는 일본의 모순
위안부 강제연행은 개인 인생을 망치는 것이었다. 성노예 피해자들의 인생이 일제 패망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죄를 지은 일이 없는데도 마치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연애나 가정 생활 등에서 말 못할 불이익을 받았다. 개중에는 아예 한국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이웃나라들을 배회하는 이들도 있다.
1945년 이전에 당한 일로 인해 그 이후 수십 년의 인생이 망가졌으니, 지금까지도 한을 품고 싸우는 피해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수많은 여성들의 인생을 망쳤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참회해야 하는데도 국가면제를 주장하며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실, 이 정도로 심각한 인권침해 사안에 대해 국가면제를 주장하는 태도는 일본 자신의 행위와도 모순된다. 일본은 국가면제 범위를 정한 '외국 등에 대한 우리나라의 민사재판권에 관한 법률(外国等に対する我が国の民事裁判権に関する法律)'을 통해 외국 국가권력을 자국 법정에 세울 제도적 채비를 갖춰놓았다. 일본에 잘못을 범한 외국 정부를 자국 재판에 세울 입법적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이 법 제10조는 인명이나 유체물을 손상시키는 외국 국가행위의 전부 혹은 일부가 일본 내에서 벌어진 경우에는 외국 국가권력도 일본 법정에 세울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처럼 인명 손상뿐 아니라 물건 손상을 이유로도 국가면제를 배제할 여지를 만들어놓았다. 그런 일본이 수많은 여성들의 인생 자체를 파괴한 자국의 행위에 대해 국가면제를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법률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또 국가면제를 거론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일본 국가권력이 과거에 법정에서 했던 발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국가면제 적용 여부가 쟁점이 된 사안은 아니지만, 일본 정부가 법정에 출석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불법 행위 책임을 인정하는 일이 1994년에 있었다. 재판이 열린 곳이 일본 자국 법정이었으므로 국가면제 이론이 적용될 여지는 없었지만, 일본 국가권력이 재판정에 나와 책임을 시인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68세의 김경석 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유족회 지부장을 포함한 강원도 출신 강제징용·강제징병 피해자 24명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제5차 공판이 그해 4월 13일 도쿄지방재판소 민사2부 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일본 정부를 대리해 법정에 출석한 대리인은 법무성 소속 검사들이었다.
재판 상황을 보도한 4월 15일 자 <한겨레> 기사 '일 정부, 징병·징용 강제성 첫 인정'은 "일본 정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징병·징용 등으로 강제 동원된 한국인 24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피해배상소송 5차 공판에서 일본의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했다"고 전했다. 그런 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법무성 검사들이 진술한 내용을 이렇게 보도했다.
이들은 또 위안부 모집에 대해 전쟁 확대에 따른 인원 증가의 필요성이 나타나 군 당국과 경영자의 의뢰를 받고 감언이설, 공포감 조성 등을 이용한 본인 의사에 반하는 모집이 수없이 많았다고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시인했다.
이처럼 일본 국가권력이 법정 진술을 통해 위안부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했다. 대리인으로 출석한 1명이 개인 소신에 따라 폭로하듯이 실토한 게 아니었다. 위 기사는 "일본 정부를 대리해 출석한 법무성 소속 야마다·고하마·히로유키 등 3명의 검사들"이 일본의 잘못을 정식으로 인정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