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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헨리 2세의 침공으로 아일랜드는 영국 식민지가 된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악연은 1534년 헨리 8세부터 시작된다. 성공회의 수장이었던 그는 아일랜드 왕이 되어 가톨릭을 차별하고 탄압했다. 17세기 찰스 1세를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은 독립을 원하는 아일랜드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도 했다.
18세기에는 영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이 북아일랜드로 이주했는데 영국은 이들에게 막대한 토지를 분배해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을 소작농으로 만들었다. 이들이 경작한 보리, 호밀, 귀리 같은 곡물은 영국으로 수출되어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량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19세기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가 맞닥뜨린 가장 큰 재앙이었다. 소작농이었던 아일랜드인에게 텃밭에서 재배한 감자는 유일한 식량이었다. 1845년 미국에서 시작된 감자 역병이 아일랜드에 돌자 많은 사람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
도울 힘이 있던 영국이 방치한 결과,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들이 굶어 죽었고 100만 명은 나라를 떠나 전 세계로 흩어졌다. 인구의 25%가 감소한 비극이었다. 1851년 감자 역병은 사라졌지만 아일랜드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고 영국에 대한 분노와 저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불타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일랜드 맥주 산업은 영국의 영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18세기까지 아일랜드에는 이렇다 할 양조장도 없고 생산된 맥주를 소비할 시장도 부족했다. 예외라면, 북아일랜드와 더 페일(the pale)이라 불렸던 더블린이었다.
영국과 가까운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은행, 부동산, 상업 등이 런던과 경제적으로 연결되었다. 먹을 곡물도 부족했던 아일랜드 서쪽, 남쪽과 달리 더블린은 영국의 경제 공동체로 아일랜드 산업의 중심이었다. 시장이 존재했고 맥주 수요도 풍부했던 이곳에서 아일랜드 맥주 산업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 1759년 앵글로-아이리시 가문 출신의 이 남자는 더블린에 9년째 방치된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양조장을 인수한다. 고향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다 성공을 위해 가장 큰 시장인 더블린으로 이주한 것이다. 9000년 동안 월 임대료 45파운드라는 놀라운 조건으로 인수한 새로운 양조장 이름이 기네스였다.
성공에 불 지핀 까만 맥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