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1949년 2월 22일 자 기사 "김대우도 수감"에서 김대우를 "황국신민서사의 장본인"이라고 썼다.
조선일보
일제 치하의 반체제 운동 때문에 투옥된 경력이 있는데도 도지사까지 됐다는 것은 그가 일본인들의 눈에 믿음직스럽고 성실하게 비쳐졌음을 알려준다. 그가 몸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열심히 친일했다는 점은 황국신민서사 제정과 관련해서도 나타난다. 일왕(천황)에 대한 언약문인 황국신민서사의 전문은 이렇다.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信愛)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하여 힘을 길러 황도(皇道)를 선양하련다.
이 서약문과 관련해 <친일파 99인>은 "1937년 10월경 그는 일제가 온 국민으로 하여금 외우고 부르도록 한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하는 계획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1991년에 나온 역사학자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김대우가 황국신민서사 문구를 직접 창작한 것은 아니지만 책임자가 되어 문구 작성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3월 1일 현장에 학생 대표로 있었던 사람이 일본을 위해 이런 일까지 했다.
일본이 그를 얼마나 믿었는가는 1945년 패망 당시에 그에게 맡긴 책무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인과 일본 재산을 한국 밖으로 안전하게 내보내야 했던 총독부는 여운형 같은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행정권을 이양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때 한국인 지도자들과 교섭하는 임무가 김대우에게 주어졌다. 김대우는 송진우를 끌어들이는 임무를 맡았다. 협상은 비록 실패했지만, 일본 패망 뒤에도 이렇게 했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그의 충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친일파 99인>은 8월 15일 정오에 일왕의 항복선언을 라디오로 청취할 당시 그가 보여준 모습을 "일왕의 항복 소식을 엄숙한 자세로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라는 문장으로 묘사한다. 패망 뒤에도 일본을 도운 점을 감안하면 하염없는 그 눈물은 진정성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친일 관료의 공금횡령
김대우는 25세 때부터 20년간 안정적으로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히로히토 즉위 기념장이나 각종 훈장은 그가 일제하에서 든든한 직장과 경제 기반을 갖도록 도와줬다. 그런 속에서 일본인들의 신뢰를 받으며 친일 관료 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관직은 1945년 8·15 이후로도 이어졌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경북지사였다. 그는 일본인 직원들이 비운 자리를 친일파로 메우며 경북도청을 '사수'했다. 10월 18일부터는 새롭게 도지사가 된 미군 대령 하에서 도지사 고문이 되고 얼마 뒤 관직을 떠났다.
1946년 1월, 그는 공금횡령 문제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다. 해방 직후에 도지사 지위를 이용해 공금에 손을 댄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조사 결과 그는 공금 20만 원을 국제회관 주인 주경진에게 준 것을 비롯하여 약 50만 원이라는 거액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친일파 99인>은 말한다.
해방 직전에 서울의 중급 가옥은 980원 정도였다. 웬만한 집 1채가 1000원이 약간 안 됐다. 김대우가 횡령한 50만 원의 가치를 이로부터 가늠할 수 있다. 일제가 주는 봉급으로 친일 재산을 축적했던 그가 일제가 나간 직후에는 공금 횡령으로 재산 축적을 시도했다.
공금 횡령에 대처하는 방법도 깔끔하지 못했다. 검찰 소환에 불응했을 뿐 아니라, 마포경찰서장인 동생 김호우를 대신 출석시키기까지 했다. 경찰이 검찰보다 막강한 시절이었다. 경찰의 파워를 앞세워 검찰 수사를 위축시키려 했던 듯하다.
검찰 출석을 피한 김대우는 그 뒤 모습을 감췄다. 잠적 생활을 하던 그가 붙들린 것은 3년 뒤였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9월 4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의해 공민권 3년 정지를 구형받았으나, 같은 달 16일에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의 결심공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고 기술한다.
정석해는 4·19 혁명 중에 거리로 뛰어나왔지만, 김대우는 4·19 혁명 직후에 모습을 공개했다. 자유당 정권 몰락 직후의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경남 양산에서 출마해 4위로 낙선했다. 낙선하기는 했지만, 출마 자체가 그의 위세와 경제력을 반영한다.
일제 치하에서 축적한 재산과 해방 직후의 공금 횡령 등에 기반한 경제력이 그를 지치지 않게 만든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탑골공원 만세 시위의 주역이면서도 친일파로 돌아선 그는 여타 친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방 뒤에도 별 탈 없이 삶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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