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야구경기 사진 속 다카하시 토오루1910년 초 동대문의 훈련원 터에서 열린 황성YMCA와 관립한성학교의 경기 장면으로 알려진 사진. 포수 뒤의 주심은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로서 대한체육회와 한국야구위원회의 자료에는 한성학교의 체육교사로 설명되어 있지만, 사실은 체육과는 거리가 먼 문학자로서 훗날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겨 조선문학사와 조선사상사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는 인물이다. 도쿄대학에 다니던 시절 야구를 접한 것으로 보이며 1903년 한성학교에 부임한 뒤 어느 시점부턴가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질레트와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처음 야구를 가르친 인물로 꼽을 수 있다.
대한체육회
동경 유학생들, 조선에 야구기술을 전파하다
1909년 와세다대생 윤기현을 중심으로 모인 25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처음 '동경 유학생팀'을 구성해 고향을 찾아 당대 조선 최강을 자부하던 황성 YMCA팀과 모국 방문경기를 벌여 무려 19대 9의 대승을 거두며 한발 앞선 일본야구의 위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했다.
그들의 방문경기는 여러모로 초창기 한국 야구계에 큰 충격을 던졌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번트'와 '더블플레이'였다. 타자 자신은 아웃당할 각오로 코앞에 타구를 떨굼으로써 주자들을 진루시키는 전술은 투수가 공을 던지면 힘껏 후려치는 것만 생각했던 당시 조선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또한 상대 타구를 잡으면 아웃카운트 한 개를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타구 하나를 가지고 동시에 두 명, 혹은 세 명의 주자를 잡아낸다는 생각 자체도 기술 이전에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야구팀은 한 가지 유니폼을 맞춰 입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게 된 것도 그들이 끼친 중요한 영향으로 꼽힌다. 깔끔한 유니폼을 맞춰 입은 동경 유학생팀과 마주 서서 보니 제각각 저고리와 잠방이 따위를 되는대로 걸치고 나온 황성 YMCA 선수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불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첫 번째 방문 경기의 성과에 대해 두루 호평이 쏟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연례행사로 자리를 잡게 됐다. 동경 유학생 모국 방문 경기는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 속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이어졌고, 1937년까지 모두 10차례나 이루어지면서 숱한 화제와 성과들을 남겼다.
그 10차례의 방문 경기를 통해 그들은 YMCA 야구단 외에 오성학교나 배재고보 같은 조선인 팀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지도 경기'를 하기도 했지만, 1928년 제8차 모국 방문 때는 일본인 팀들의 전용구장 격이던 용산 만철구장으로 원정해 철도구락부와 맞대결을 벌여 역전승 하며 늘 기죽어 있던 조선인 팀들의 대리 복수를 해준 적도 있었다.
고시엔의 조선 소년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더 많은 학교에서 야구부가 만들어졌다. 전조선야구대회가 꾸준히 개최된 것도 이유가 됐지만, 일본에 전국야구대회 체제가 확립되면서 조선 지역의 학교에 출전권이 주어지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일본은 1915년에 아사히(朝日) 신문사 주최로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를 창설했다. 토너먼트를 통해 지역별 예선과 본선을 치르며 전국 최고의 중등학교(오늘날의 고등학교) 야구팀을 가리는 대회다.
특히 1924년부터는 새로 지어진 고시엔(甲子圓) 야구장에서 본선을 치르게 되면서 '고시엔 대회'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됐다. 고시엔은 공교롭게도 10간(干)과 12지(支)의 첫 글자가 모인 갑자(甲子)년인 1924년에 완공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무엇보다 1932년에 '야구통제령'이 내려지면서 여름에 치러지는 '우승야구대회'와 봄에 치러지는 '선발야구대회'를 제외한 모든 전국야구대회가 폐지된 이후로는 지금까지 일본의 '유이한' 전국고교야구대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두 대회 모두 고시엔 구장에서 본선을 치르게 되면서 각각 '여름 고시엔'과 '봄 고시엔'으로 불리는데, 그중에서도 더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전국 모든 학교에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 여름 고시엔이다. 오늘날 '여름 고시엔' 대회는 해마다 3000개 이상의 팀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종목 아마추어 스포츠 대회이기도 하다.
그 대회가 2회째를 맞던 1916년에 중앙 YMCA 야구단이 조선 대표로 출전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한반도의 야구는 과도기에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하지만 식민지로 이주하는 일본인과 그 자녀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상황이 바뀌어 7회 대회가 열린 1921년부터는 조선 지역과 만주 지역의 학교들도 자체 예선을 통해 출전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호가 개방된 뒤에도 조선 지역 대표로 본선에 출전하는 것은 대부분 일본인 학교들이었다. 1921년 제7회 대회부터 태평양 전쟁으로 대회가 중단되기 전인 1940년 제26회 대회까지 조선의 학교들에 출전 자격이 주어진 20번의 대회에서 경성중학이 7번 대표로 선발된 것을 비롯해 부산중학, 평양중학, 인천상업중학, 부산상업중학 등 일본인 학생들이 주로 다니던 학교들이 대부분의 본선 출전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1923년 7월 27일, 경성중학 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지역 예선 결승전에서 한국인 학생들로만 구성된 휘문고보 야구부가 한 해 전 조선 대표로 선발됐던 일본인 학교 경성중학을 10대 1로 크게 이기고 본선 진출권을 획득하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야구부를 만든 학교인 휘문고보는 동경제국대학에 유학하던 시절 '6대학 리그'에서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동경 유학생팀'의 4,5,6차 모국방문 경기를 주도했던 박석윤을 감독으로 영입해 일본의 학교들과 대등한 수준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야구지도자였던 그의 지도 아래 투수이자 4번 타자였던 김종세와 포수로서 3번 타자로 활약한 김정식이 공수의 핵을 이루어 강한 전력을 만든 휘문은 본선에서도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뒤 2회전에서 만난, 역시 선수 전원은 일본인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만주 대표 대련상업을 9대 4로 누르며 8강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4강 진출권을 놓고 만난 리츠메이칸 중학과의 3회전에서도 8회까지 4대 4로 팽팽히 맞섰지만 결국 9회 초에 3점을 빼앗기며 7대 5로 탈락했다. 휘문고보가 출전했던 당시에는 아직 오사카 고시엔 야구장이 지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고시엔 대회'라는 약칭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 외에 한국인 학생으로만 구성된 팀이 본선에 진출한 적은 없었지만 대구상업(1930)이나 평양중학(1932), 신의주상업(1935), 인천상업(1936), 평양1중학(1940) 등 일본인 학생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학교들이 조선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그 안에 속해있던 한두 명의 한국인 학생이 함께 고시엔 구장을 밟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중 1936년 인천상업 선수로서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았던 김선웅은 해방 후 인천고 야구부를 재건하고 지도해 1950년대 인천고의 무적 시대를 이끌며 김진영과 서동준을 비롯한 한국야구계의 중심적인 인물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생각보다 멀었던 한국과 일본의 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