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들은 수영복이나 반바지 입는 바다에서도 난 등산화를 신고 긴바지를 입었다.
김승재
그냥 차를 타고 다니라거나, 헬스 자전거를 타라거나,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보라는 동정 어린 조언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말들은 내가 처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줬고, 그만큼 더 우울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정강이 가득한 상처 자국을 감추고 싶어졌다. 누군가가 그 상처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싫었고, 아무 말은 안 해도 혹시 내 상처를 보고 있을 그 시선이 싫었다. 난 아무리 더워도 언제나 긴바지를 입었다. 그러면 상처가 낫고, 그러면 내 감정도 편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점점 더 우울의 늪으로 빠져갔다.
동시에 내 맘 한구석에서는 밖으로 나가라고, 나가서 걸어보라고 부추기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난 억지로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갔다.
삶의 작은 문턱조차 쉽사리 넘지 못해
쉽지 않았다.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시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경사에도 휘청였고, 정말 이상하리만큼 작은 턱에도 발이 걸렸다. 보일 때는 전혀 몰랐는데, 길에는 크고 작은 돌이나 턱이 너무 많았다. 발이 걸리고 발목이 돌아갔다. 무릎이 시큰했고, 가끔은 허리가 아픈 적도 있었다.
잘 포장된 산책로라서 조금 속도를 내 맘껏 걸어보기도 했지만, 참 얄궂게도 작은 턱에 부딪혀 운동화가 벗겨져 날아갔다. 경계면의 아주 작은 높낮이 차이에도 내 발목은 쉽게 돌아갔고 난 주저앉기 일쑤였다. 윤도현이 목청 높여 노래했듯 진짜 '삶의 작은 문턱조차 쉽사리 넘지 못'했다.
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마다 내 손을 잡아준 가족과 친구들이 미안해하는 걸 보기가 힘들었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안 보이는 주제에 설치고 다니는 게 꼴사납게 느껴졌다. 편하고 안전하게 그냥 머무르면 될 일이었다.
아,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만약 그랬다면 난 지금쯤 아주 깊고도 깊은 우울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난 이렇게 세상을 향해 수다를 떨고 있다. 그건 내 맘속 깊은 욕망을 이해하고 내게 도움의 손길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덕분이다.
부모님은 내 손을 잡아주셨고, 딸과 아들은 어깨를 내어줬으며, 아내는 팔짱을 끼고 함께 걸었다. 도서관이든 산이든 바다든 어디든 나를 데리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고, 어디를 가든 시시콜콜 모든 걸 설명해 주려는 친구 같은 누님도 있고, 하루 10km라도 거뜬히 나와 함께 걸어줄 활동보조인분도 만났다.
이렇게 우울이라는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온 나는 신체적 고통에서 벗어날 도구를 찾았다. 바로 등산화였다. 발목까지 받쳐주는 튼튼한 등산화는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었고, 웬만한 삐끗거림도 버텨줬다. 더 이상 고통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도시의 복잡한 길을 걸어도, 한여름 무더위 속을 걸어도, 조용한 산책길을 걸어도 난 등산화를 신었다.
난 그들의 도움으로 이제 웬만한 산길도 간다. 난 어디든 갈 수 있다. 비록 여전히 내겐 너무 위험한 길이라고 말리는 이도 많고, 절대 데려가려 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두 다리로 안 된다면 기어서라도 갈 용기와 의지가 있다. 이게 바로 내가 이 새로운 세상을 살면서 알게 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렇게 떠들게 된 이번 여름, 난 다시 반바지를 입었다. 이제 더 이상 그 상처가 부끄럽지 않다. 그건 그냥 상처일 뿐이니까.
아마도 다시 우울로 돌아가는 일은 드물 거라 믿으며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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