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소개된 박영철의 친일 행적.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그의 전업은 1929년에도 있었다. 식민지 하에서 한국인이 갈 수 있는 최상위 관직까지 승진한 그는 이번에는 산업계로 이직했다. 식민지 수탈 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가 되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삼남은행 두취(은행장)가 되고, 그 뒤 각종 기업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미곡창고주식회사·조선철도주식회사·조선신탁주식회사·조선맥주주식회사 등의 취체역(이사)으로도 활동했다.
직업은 바뀌었지만, 친일파라는 인생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1933년 6월에는 '친일파 명예의 전당'이라 할 수 있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다. 매년 1800원의 수당이 나오는 이 직책은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됐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는 박영철이 받은 금전적 혜택으로, 1910년부터 2년간 일본군 소좌(소령)으로 근무하면서 받은 750~850원의 연봉, 1908년에 러일전쟁 종군기념장과 함께 받은 은사금 500원, 익산군수 때부터 함북지사 때까지 받은 1000~6000원의 연봉, 중추원 참의 시절 받은 연수당 1800원을 열거했다. 그런 뒤 국가에 귀속시켜야 할 재산으로 시가 3211만 원 상당의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곡리 부동산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가 받은 혜택이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았다.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1904년 3월부터 대한제국 장교로 근무했고, 동일한 배경에 힘입어 1929년부터 재계 활동을 했으므로 1910년 이전과 1929년 이후의 수입도 친일재산 범주에 넣는 게 이치에 맞다.
위에서 소개한 '<고 박영철씨 기증 서화류 전관 목록>을 통해 본 다산 박영철(1879~1939)의 수장 활동'이라는 논문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일제강점기의 주요 미술품 수장가였다. 이 논문은 "사후에 수장품을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여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한다. 그가 수집한 미술품을 상대로도 친일행위와의 연관성을 검토하는 게 타당하다.
박영철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국방헌금 1만 원을 헌납했다. 도지사 연봉인 6000원을 훨씬 넘는 거액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38년 8월에는 경성부를 방문해 '국가적으로 귀중한 금을 개인이 소장할 수 없다'며 금컵 2개, 금줄 1개, 금비녀 1개, 금단추 1벌 등을 기부했다. 이런 예시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일본에 아낌없이 바쳤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받은 것 역시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세상 떠나자 훈장 하사한 일본
일본의 혜택을 많이 받은 인물이라는 점은 한국인들을 상대로 협박성 글을 발표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친일파 99인>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때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이 독립해봤자 "구(舊)한국 악정의 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2년 전에 볼셰비키 혁명을 겪은 "러시아의 현상과 같은 비참한 지경에 빠질 뿐"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일본에 불만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탄원하라면서, 만세 시위로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 등의 행위를 하면 각처에 주둔한 일본군이 "용서 없이 병력을 쓰기로" 돼 있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도쿄에서 집필한 '내선융화책 사견'이라는 글에서는 '조선인은 무능하기 때문에 자립할 수 없으므로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일본도 이런 조선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라며 한·일 두 민족의 융합을 촉구하기도 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을 꾸짖고 일본의 분발을 촉구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일본 사랑을 드러냈다.
일본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으며 일본과 융합해야 한국은 잘될 수 있다는 박영철의 주장은 오늘날 한국 극우세력에게서도 나온다. 수요집회를 방해하는 사람들과 소녀상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박영철과 한국 극우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혜택을 본 한국인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인 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식민지배는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재벌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한국의 대중은 처음부터 착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소수의 한국인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은 이들의 협력 없이 한국을 지배하기 힘들었던 일본 지배자들의 사정에 기인한다. 박영철과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며 한국 대중을 답답해하지만 실상은 이들이 답답한 사람들이다. 소수의 한국인에게 혜택을 주면서 다수의 한국 대중을 착취한 일본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받은 게 떡고물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한 채 박영철은 1939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일, 일본은 그에게 욱일중수장을 비롯한 훈장과 상품을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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