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는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는 데 오래 걸렸다.
픽사베이
아하! 우영우 변호사 앞을 날아다니던 거대한 혹등고래가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기적의 깨달음이었다. 만약에 아파트가 돈을 벌어다 줬다면 우리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을까. 분명한 건 아파트가 먼저 내게 모욕감을 줬다는 사실이다.
대학 시절 부모님은 광역시로 유학 간 삼남매의 평안을 위해 짐작건대 마이너스 통장을 바닥까지 긁어서 13평 주공 아파트 전세를 장만했다. 계약하는 날 특별시에서 내려온 화려한 복장의 집주인은 사기꾼이었고, 호구였던 우리는 전세 사기를 당했으며 아파트는 경매로 넘어갔다. 평안하지 않았던 아파트와의 악연을 끊을 필요가 있었다.
'넓고 최고급인 너의 아파트'가 '좁고 후진 나의 아파트'와 도긴개긴이라는 심각한 인식의 오류는 겁나 좋고 비싼 아파트에서 살아보지 못한 처지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미천한 경험과 소소한 불편에 사로잡혀 대의를 놓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파트는 어쩌면 행복을 주는 집일지 모를 일이었다. 전 남친이 쓰레기였다고 연애를 포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연애는 계속되어야 했다. 황급히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약 통장 어디 있어?"
"청약 통장 없는데."
"헐. 나도 없는데. 왜 없지?"
"뭐어?"
"그럼 없다 치고, 만들면 되지. 당장 만들어서 오늘 아파트 청약 넣자. 피만 몇 억이 될 거래. 대박이지? 이제 우린 부자야."
"대체 뭔 말을 하는 거야?!"
무식은 죄가 없지만 예의 없음은 죄다. 청약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 무식함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그런 판국에 신기루 같은 부당이익금을 꿈꾸며 들떴다니. 뻔뻔하게 버릇없이. 나를 '부자 엄마'로 만들어 줄 뻔했던 아파트 청약과는 허무하게 각자의 길을 갔다. 아파트는 역시 노답이야, 단순명료한 결론이 나쁘지 않았다.
감가상각되는 신비한 아파트
한편에는 미심쩍은 의문이 남았다. 전국 아파트가 싹 다 오르는데 왜 내가 사는 아파트 가격은 자꾸 내리는 걸까 궁금했다. 입사 지원서도 내보지 못한 대기업에서 만들고 가까운 대학 캠퍼스를 정원처럼 내려다보는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아파트인데. 최소한 물가 상승분만큼은 올라야 하지 않나 싶었다. 이에 남편은 어떤 전문가도 내놓지 못한 기똥찬 진단을 해냈다. 값 떨어지는 아파트가 '정상'이라는 것이다.
자동차를 몇 달만 타도 가치 평가에서 수백만 원이 차감되는 것처럼 시간 흐름에 따른 유형 자산의 가치 감소는 당연하다. 고로 사람이 사용해 낡아가는 집에 감가상각비를 적용하면 가격이 점점 내려가는 우리 아파트가 정상적이라는 분석이었다.
듣고 보니 어디 한 군데 틀린 말이 없다. 이래서 어른들이 기술을 배우라고 했나 보다. 공대생 기술자 남편의 판단은 정확했다.
최저 기온을 갱신한 어느 겨울밤, 보일러가 멈춰 섰다. 감가상각 원칙에 따라 가치가 하락하는 희귀한 우리 아파트는 스스로 정체성을 증명했다. 영끌해서 집 짓느라 한 푼이 아쉬울 때였다. '경축 아파트 탈출' 이삿날이 한 달도 안 남은 상황이었다. 야속한 보일러야, 조금만 더 버텨주지. 그간 불태운 정이 있는데. 매정한 귀뚜라미 같으니라고.
급한 대로 전기장판을 꺼내 온 식구 옹기종기 끌어안고 하룻밤을 보내는데,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캠핑 왔다 생각하며 오리털 파카 입고 이삿날까지 버텨볼까, 궁서체로 고민했다. 그러나 애 키우는 집에서 온수를 못 쓰는 상황은 난망하기 이를 데 없었고 별수 없이 애프터서비스를 요청했다. 보일러를 살피는 수리 기사님 앞에서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딱 한 달만 작동하게 아니 작동하는 척하게 해 주실 순 없을까요, 뿌잉뿌잉. 얼기설기 눈속임하고 튀어라 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마음의 소리 일발 장전하고 애타는 눈빛 발사하며 기사님을 협박한 파렴치한이었음을 자백한다. 기사님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