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호(전무송)는 소영에게 다정하게 “소영씨”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CGV 아트하우스
소영을 시기하는 다른 박카스 할머니와 다투고 버스를 타고 가던 소영은 단골 고객이었던 재호(전무송)를 우연히 만난다. 소영의 고객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들이다. 재호는 대중교통을 타고 꽃배달을 하는 중이다. 아내와 사별 후 혼자 살고 있는 재호는 "나 이제 그 짓도 못 해. 더 이상 남자가 아닌 거지"라며 한동안 종로를 찾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한다. 소영이 "오빠 말고도 안 보이는 분들 꽤 돼요"라고 하자 재호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모두들 번호표 타놓고 기다리는 인생들이니 안 보이면 병들었거나 죽었거나 하는 거지.
재호는 소영에게 다정하게 "소영씨"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재호와 대화를 나누던 소영은 재호만큼이나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고객이었던 세비로 송이 중풍에 걸려 요양병원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영은 음료를 사들고 송 영감의 병원을 찾는다. 늘 단정하게 맞춤양복을 입고 다니던 송 영감은 이제 침대에 누워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 신세가 됐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변을 처리하는 모습을 소영에게 보인 날, 송 영감은 울면서 소영에게 절규한다.
사는 게 챙피해. 죽고 싶어. 뭐냐고 이게. 나 좀 도와줘.
어두운 밤, 병실을 찾은 소영은 송 영감의 입에 농약을 들이붓는다. 흐느끼는 소영을 본 노인은 "괜찮아"라며 더 크게 입을 벌린다. 소영은 차마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어쩌자고 그랬어"라는 재호의 질문에 소영은 "그러게요. 제가 미친년이죠"라며 고개를 숙인다.
영화 초반, 민호를 데리고 왔을 때도 소영은 "내가 미쳤지"라는 말을 한 적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이자 범죄이지만 소영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못 본 채 할 수 없어서 저지른 일이다. 사람들은 소영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진실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지 모른다. 박카스 할머니의 "진실된 얘기"를 듣고 싶다며 소영을 찾아온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소영은 말한다.
진실 좋아하네. 사람들 진실에 별 관심 없어. 다 지 듣고 싶은 얘기나 듣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송 영감의 죽음 이후, 재호는 소영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치매에 걸려 혼자 살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죽여달라는 것. "의지할 데 하나 없고 앞으로 지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저놈 처지가 너무 불쌍하"다고. 소영은 처음에는 화를 냈다가 결국 재호와 그의 친구의 부탁을 들어준다. 급기야 재호는 혼자 남아 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비참하다며 소영에게 죽을 때 옆에 있어 달라 부탁한다. 재호는 홀가분한 얼굴로 자신의 입에 수면제와 독극물을 털어 넣는다.
화가 났다. 평생 여성의 돌봄 노동에 기대어 살아온 남성들이 푼돈을 주고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죽는 것도 혼자 못 해서 죽여달라는 부탁까지 하다니. 어쩜 저리도 이기적일 수 있을까. 본인들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소영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걸까.
이런 나의 분노와 무관하게 소영의 얼굴은 죽음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덤덤해진다. 앞서 소영은 재호에게 젖도 안 뗀 아이를 입양 보낸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진짜 나쁜 년"이라고 "평생을 빌고 빌어도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말한 적 있다. 자신은 지옥에 갈 거라고. 아이를 입양 보낸 순간부터 소영은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죽을 수 있는 선택지조차 자신에게는 사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삶,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소영이기에 삶 대신 죽음을 택한 노인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일만큼은 자신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소영을 "꽃뱀"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돈 100만 원에 사람을 죽인 할머니"라고 부른다. 하지만 세상의 언어로는 소영의 선택을 설명할 수 없다. 아래 소영의 대사처럼 말이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그냥 다들 거죽만 보고 대충 지껄이는 거지.
시할머니의 10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