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원회 창립총회1981년 12월 11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KBO 창립총회. 당시 명칭은 '한국프로야구위원회'였다. 테이블 앞쪽에 서종철 총재(오른쪽에서 두번재)와 이용일 사무총장(왼쪽)이 앉고, 그 뒤로 각 구단 대표들이 앉아있다. 서종철 총재는 국방부 장관을 지낸 군 원로로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던 시절 부관으로 인연을 맺은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총재로 낙점했다.
한국야구위원회
한국야구위원회가 청와대와 맺어온 관계는 역대 총재의 면면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전두환 정권에서 서종철(전 국방부 장관)과 이웅희(전 MBC 사장, 문공부 장관)가 총재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노태우 정권의 이상훈(전 국방부 장관), 김영삼 정권의 권영해(전 안기부장), 김기춘(전 법무부 장관), 홍재형(전 재경부 장관), 김대중 정권의 정대철(여당 5선 의원) 등의 '권력 실세' 혹은 대통령의 '복심' 들이 야구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총재로 '부임' 했던 것이다.
의결권의 수와 관계없이 한국야구위원회 이사회에서 총재와 사무총장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쉽지 않았던 배경이다.
그리고 한국야구위원회 사무국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통해 리그 창설을 기획하고 추진한 '이용일-이호헌(이용일과 함께 프로야구 창설 계획을 만들고 KBO 초대 사무차장을 지냈다) 팀'에 뿌리를 둔 조직이었다. 프로야구 창설 초기에 사무국이 리그 운영을 주도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했다. 사무국이 기획하고 청와대의 승인을 받거나 청와대의 지침에 따라 사무국이 기획한 사안이 이사회에서 의결되는 형식을 밟으며 리그가 운영되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
프로야구 운명 가른 그날 회의에서 무슨 일이 http://omn.kr/1z68k)
사무국은 전체 영입 대상 선수들을 등급화하고 각 등급에 대한 연봉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각 구단에 통보함으로써 계약 내용을 막후에서 결정했고, 어린이 회원 제도를 구상하고 기본적인 운영방식을 설계해 배포했을 정도로 세밀하게 개입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각 구단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구단들이 미처 구상하거나 꼼꼼하게 기획할 여력을 갖추기 이전에 제공됨으로써 시행착오의 시간 낭비를 줄인 결과적 성공 요인이기도 했다.
민주화, 프로야구와 청와대의 연결 고리를 끊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고, 사회 전반에 꼼꼼히 드리워져 있던 청와대의 영향력이 조금씩 걷히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권한 회복을 골자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새 헌법에 의해 1987년 12월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어 1988년 2월 취임했다. 그와 동시에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 역시 마무리되었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소멸시킨 것은 민주화운동과 그 성과로서의 개헌이었다.
민주화는 자연스럽게 사회 각 분야에서 국가의 개입을 약화시켰고 그런 변화는 자연스럽게 기업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1990년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를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감독과 규제의 통로를 분산시켰고, 방송국에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편성권 감시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정부의 지시가 관철되는 방송은 어렵게 됐다.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의 자율성이 강화된 반면 방송국을 통한 일방적인 지원은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기, 특히 유신개헌 이후 15년간 국가의 권한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그 작동범위가 넓었던 만큼 민주화 이후 그것이 축소되는 속도와 규모도 매우 빠르고 컸다.
새 정부에서도 스포츠의 정책적 위상은 여전했다. 새 대통령의 임기 첫해인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치러졌고, 전두환 정부에서 초대 체육부 장관으로서 올림픽 준비를 총괄했던 노태우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이후에도 체육진흥에 대한 국가적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야구는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니었고, 특히 프로야구는 전임 대통령의 업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리고 1987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심각하게 대두된 물리적 충돌과 극심하게 편중된 지역별 득표율로 인해 부정적인 면이 두드러진 지역주의와 겹치는 이미지를 가진 것도 프로야구의 곤란한 점이었다.
전두환 정권과 차별화하는 동시에 지역주의적 대결 의식의 완화를 지향해야 했던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중 한 번도 프로야구장을 찾거나 시구를 하지 않았고, 프로야구를 진흥하기 위한 정부 기관의 특별한 지시나 협조 당부도 없었다.
프로야구에 대한 국가 개입이 줄어들면서 청와대의 영향력이 야구계에 전달되는 창구 기능을 하던 사무국의 권한도 자연스럽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넓어진 권력의 여백으로 기업들의 적극적 발언들이 채워지며 리그 운영의 주도권도 이사회로 점점 넘어가기 시작했다.
1988년,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리자마자 KBO 이사회에서는 이미 몇몇 구단의 대표이사들이 사무총장의 의결권 회수를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용일 총장의 수완은 여전했고, 새 정부의 의지도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전임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이기도 한 신임 노태우 대통령의 차별화 행보가 어느 정도의 보폭으로 이어질지는 속단하기 어려웠다.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7개 구단의 뜻이 하나로 모이기가 쉽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실제로 정권 핵심층에서 총재를 선임해 내려보내는 일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계속되면서 사무국의 권한은 어느 정도 유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영향력이 소멸된 이후 정치권력과 사무국의 연결 고리가 약화되는 추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