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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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등록 2022.06.20 10:39
오랫만에 강아지와 하루종일 한강에서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강아지도 나도 노곤해져 두 눈이 감길 듯 말 듯 했다.
강아지가 쏙 들어간 배낭을 앞으로 메고, 손잡이를 붙잡고 서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 이름 모를 벌레 한마리가 내 손등 위를 기어간다. 
너무 작아서 일부로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제자리서 뱅글뱅글 돌았다 다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어디를 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듯 보였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벌레는 죽기 전에 지하철에서 내릴 수 있을까 ?
하늘 아래도 아니고 땅 아래서
이렇게 제자리를 뱅뱅돌다 죽는다면 조금 불쌍한데...
아니지... 이 벌레는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 별 생각 없을거야.
배낭 안에서 눈을 꿈뻑이는 강아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진 않아.
왜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죽는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동물은 인간 뿐이야.


갑자기 한강에서 만난 미혼의 친구가 
너무 나이 들기 전에 아이를 낳고 싶다 말한게 떠오른다.
그 친구가 아이 이야기를 한건 처음이었지만 그런가보다했다.
아이를 낳고 싶단 마음은 해명이 필요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난 결혼하고 몇 년 동안 남편과 둘만 지내다보니 가끔 아이 소식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둘 앞가림도 잘 못하는데 아이를 낳아도 될까 ?'
난 이런 말을 하면서 대강 대답한다. 
남편도 이따금씩 '언젠가 도래할 미래'의 아이를 가정한다.
솔직히 난 한번도 진지하게 아이를 낳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와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개념 사이에는 건널수 없는 강이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
내 경제력 때문일까,
내 두려움 때문일까,
내 욕심 때문일까,
내 염려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손등에 다시 초점을 맞추니 벌레가 사라졌다.
멀리는 못가고 손잡이 위에서 다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제자리를 뱅뱅돌고 있다.
이 미물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을까 ?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을까 ?
태어난 이유... 거창하게 존재의 이유... 그런거 없지 않나 ?
그냥 태어난거지, 태어났으니 사는거고, 살다보면 죽는거지...
그거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이유가 있다면 엄마 아빠가 날 낳은 이유가 있었겠지. 
이 벌레의 부모가 벌레를 낳은 이유는 있었겠지. 
거역할 수 없는 번식의 욕망도 이유라면 이유니까.
자기가 태어난 이유를 찾기 위해 자식을 낳은 것이라도 이유는 이유니까.

내 앞가림도 못한다는 말... 독박육아가 걱정된다는 말... 
거짓말도 아니지만, 사실은 그냥 하는 말이다.
그런 말들은 이해될 수 있으니까.
내가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하지 않는... 이런 반순리적이고 해명이 필요한 일에 
이렇게 이해될 수 있는 말로 핑계를 댈 수 있는,
그런 세상에 사는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짧게는 몇 년, 길어 봤자 몇 십년 사이에,
내가 아는 세상,
내 부모가 알았고, 내 부모의 부모가 알았고, 부모의 부모의 부모....가 알았던 세상이...
무너질 거야.
아니, 그래도 완전히 무너지진 않겠지...
적어도 상당히 훼손되고 뒤죽박죽이 될거야.'

내 부모는 수대에 걸쳐 축적된 삶의 지혜를 나에게 전수해 주었는데,
그 지혜는 기후위기를 모른다.
선조들이 지혜를 영글었을 때의 자연은 
가끔 돌발하고 위협했지만 
끝에는 언제나 온화하게 품어내고 아낌없이 주었다. 
그런 자연 안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더 풍요로운 것을 위해 치열하게 일했고 싸웠고 일궜다. 

그 지혜를 머리에 이고 
돌이킬 수 없는 한계에 임박한 이 땅 위에 서서,
나는 어디로 가야할 지 잘 모르겠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얻고 쌓고 이루라는 명령대로
뭐라도 되겠다고 뭐라도 하겠다고 아득바득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모든 걸 멈추고 내가 아는 가장 깊은 자연으로 들어가고 싶다.
오직 먹고 자는 일에만 신경쓰고, 해가 뜰 때 일어나 질 때 자고 싶다.
다음날 눈을 뜨면 다시
저기 높은 어딘가에 닿기 위해 좋은 기회가 없을까 탐색한다.
지친 몸으로 눈을 감을 때면
더 벌고, 더 쓰고, 더 부지런하게, 더 빨리, 더 앞으로, 더 발전적으로, 더 멋지게....를 안하고 싶다.
최소한만 먹고 쓰고, 아주 느리고 소박하게, 내게 아름다운 것을 찾으며 살고 싶다.

시간은 애타게 아니 무심하게 흐른다.
전쟁과 코인 사이에서 세상은 어디로 가는걸까... 
난 어디로 가야할까...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뱅글뱅글,
지하철에서 죽음을 맞이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겠어.

내 고민은 분리수거도 텀블러도 아니고, 유기농도 비거니즘도 아니다.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화려한 껍데기를 하고 탐스러운 상품이 되어 
내 욕망을 자극할 때, 온몸에 힘이 빠진다.
지독하게 무거운 몸을 겨우 깨워서 씻고 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왔는데 
그것조차 꿈이라 다시 한번 잠에서 깨어야한다는 걸 알아버렸지만,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그런 느낌. 
그냥 다시 꿈으로 돌아가자, 더 나은 세상으로 가자는 꿈 말이야.
그래야... 행복까진 모르겠고, 조금이라도 편해진다.
다시 깰 필요없이, 그냥 그 길로 출근해 !
깨서 출근하는거랑 다르면 뭐가 얼마나 다르겠어 !

난 아마도 '기후우울'이라는 이름의 간헐적인 우울장애에 빠진게 아닐까...

'나는 나의 엄마아빠처럼 아이에게 
더 좋은 세상, 더 훌륭한 사람, 더 아름다운 지구를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해맑은 남편이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생태주의 활동가로 키우는게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이가 컸을 때 쯤에 활동가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그러니 남편은 그렇다면 전사나 생존 전문가로 키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생각지 못한 답변에 헛웃음이 터진다.
내 무거운 우울을 가볍게 되받아치는 해맑은 남편이 있다는 건 이 와중에 다행인 일이다.

그냥 태어난거지, 태어났으니 사는거고, 살다보면 죽는거지...
그거 말고 뭐가 더 있을까.
그냥 낳아 !
우리가 당면한 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알려줘 !
"그래 한번 살아봐라, 함께 살아보자" 그럼 되지 !
지구가 아름다운 구석들을 조금이라도 간직했을 때 
단 한명의 존재라도 더 
이 아름다움을 살아본다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 존재가 '엄마 아빤 정말 무책임해'라고 원망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렇게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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