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가운데, 지난달 보수단체의 소녀상 철거 주장 원정 집회에 이어 이번엔 일장기를 내건 시설물까지 등장했다. 18일 부산시 동구 강제징용노동자상 상황. 일본의 사죄배상을 촉구하고,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상징물이지만, 뒤로 '화해거리'라는 글자와 일장기가 붙어있다.
오마이뉴스
보도(
부산 강제징용노동자상에 '일장기' 모욕 행위, http://omn.kr/1yz18)에 따르면, '진실국민'이라는 보수단체가 지난 17일 이곳에 비상식적인 구조물을 설치했다. 노동자상 바로 옆에 구조물을 설치해놓고 '화해거리'라는 플래카드와 태극기·일장기를 걸어놓은 것이다. 23일자 <부산일보> 기사 '초량 항일거리에 웬 화해거리? ···부산서도 수요시위 방해 비화하나'에 따르면, 23일 현재 일장기는 치워졌다.
자경단
식민지배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가 보수·극우 세력의 방해를 받는 일은 1919년 3·1운동 때도 비일비재했다. 전북 익산군 솜리장터에서 4월 4일 벌어진 만세시위 때는 그런 훼방이 전투적 양상을 띠었다.
익산군에는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 같은 장소가 있었다. 익산 구시장 언덕에 위치했던 대교농장이 그곳이다. 일본에서 오하시은행을 경영했던 오하시 요이치(大橋興市)가 일제 강점 3년 전인 1907년에 건설했던 농장이다. 자국의 위세를 배경으로 지역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대농장을 구축한 오하시는 익산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이 땅을 지키고자 무장 조직을 만들었다.
2017년에 <선교신학> 제47집에 실린 김은수 전주대 교수의 논문 <익산 4·4만세운동의 특징과 선교적 의미>는 주명준·정옥균의 <전북의 3·1운동>을 근거로 "(오하시 요이치가) 자경단을 만들어 자체 경비를 하였고 총독부와 교섭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대를 익산에 주둔하도록 하였다"고 설명한다. 현지 한국인 중심으로 결성될 수밖에 없는 자경단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1919년 4월 4일, '속 리'를 써서 이리(裡里)로도 불린 솜리라는 이름의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익산군민 시위대는 일제 수탈의 상징인 그 농장을 향해 나아갔다. "시위대가 가까워지자 위세에 눌린 일본군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첫 번째 총성은 공포탄이었고 이내 만세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고 한 뒤 "더욱 만세 소리가 높아지자 그들은 당황하여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쏘았다"고 위 논문은 서술한다.
만세 시위대를 일본군만 상대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군이 발포하기 직전에 시위대와 맞서 싸운 집단이 있었다. 오하시 농장의 자경단이 바로 그들이다.
3·1운동 100주년 시기인 2019년 3월 29일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농지 수탈에 반일감정 폭발 ··· 솜리장터에 울려퍼진 핏빛 함성>은 "시위대에 놀란 대교농장 자경단과 일제 헌병들은 창검과 총·곤봉·갈구리 등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라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시도였지만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 뒤 "위기감을 느낀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군대 발포 직전에는 자경단이 시위대를 막고자 앞장섰던 것이다.
보수·어용단체 이용해 시위 진압
식민지배 청산을 위한 노력이 훼방을 받는 일은 익산뿐 아니라 전국 도처에서 발생했다.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전국적으로 분출한 만세시위를 군대와 경찰만으로는 진압하기 힘들었던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을 내세워 보수·어용단체를 만들게 하고 이들을 이용해 시위 진압 및 방지에 나섰다.
2017년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에 수록된 역사학자 이양희의 <3·1운동기 일제의 한국인 자위단체 조직과 운용>은 "일제는 각 도(道)의 행정기관과 경무 관헌을 동원해 민심이 불안정한 지역을 우선으로 한국인 자위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고 한 뒤 "138군(郡)이 넘는 지역에서 한국인 자위단체가 조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자위단·자제단·자성단 등으로 불린 보수·어용단체의 회원들은 만세시위의 낌새가 발견되면 경찰에 신속히 신고했다. "(자위단) 규칙에 의하면 자위단원은 군청과 경무 관헌의 지휘·감독 아래 만세운동 인쇄물을 가지고 다니거나 계획 등을 한다고 의심되는 자, 또는 이들을 숙박시킨 자를 발견할 시 밀고할 것을 요구받았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