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당시 시위를 진압하려고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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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1권에 수록된 김도형 계명대 교수의 '박중양: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에 따르면, 대한제국이 존속하고 있을 때인 1908년 12월 박중양은 일본인들을 모아놓고 어이없는 친일 발언을 입에 담았다.
경북관찰사인 그는 일본인들 앞에서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의 지도편달에 달려 있습니다"라며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일본인들이 스승의 책임을 느끼며 한국인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발언을 일제 강점 이전에 공개 석상에서 했던 것이다.
그는 해방 4년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을 때는 "크게 본다면 일소(一笑)에 불과한 희비극이다"라며 대수롭지 않은 일을 겪는 듯이 웃어넘겼다. 또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발언도 했고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는 발언도 했다. 평소에 즐겨하던 이런 식의 발언들을 대구지검 검사 앞에서 했다면, 그것 때문에도 그 검사가 정신이상을 의심할 만했다.
1957년의 그 사건은 불기소로 끝났다. 정신이상이 인정된 결과였다. 그렇지만 정신병원 입원은 무산됐다. 그가 완강히 거부한 결과다.
일본 군대 보고 충격
만약 담당 검사가 그의 과거 이력을 조사했다면, 그가 스무 살 때 '문명의 충격'을 겪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정신이상을 근거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검찰의 결론에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박중양은 1874년 5월에 출생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이 최초로 외국을 침략한 타이완 침공(대만 출병)이 있었던 달에 태어난 것이다. 구한말 기록인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그가 지방 아전으로 언급된 것을 보면, 그의 아버지 역시 아전 출신이었을 확률이 높다. 지방 아전 직은 세습되는 게 보통이었다.
박중양이 문명의 충격을 받은 해인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상륙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제압한 뒤 여세를 몰아 동학혁명군까지 진압했다. 바로 그 일본군을 박중양은 한양 동소문 근처에서 우연히 조우했다. 서울 대학로 인근에서 일본군과 부딪혔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외국 군대를 보고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동경의 눈빛으로 일본군을 바라봤다. 2019년에 <일본공간> 제26호에 실린 이형식 고려대 교수의 논문 '친일 관료 박중양과 조선 통치'는 우연한 조우를 계기로 박중양이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모했다고 설명한다. 박중양은 일본군이 청나라를 꺾고 승세를 타는 소식에 매료됐고, 신흥 강대국 일본을 모방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는 일본인을 닮고자 외모도 스스로 바꾸었다. 위 논문은 "일본인 이발소에서 상투를 자르고 일본인과 술을 마시면서 필담하는 등 일본인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라고 설명한다. 그 시절 조선 땅에서 일본인 헤어스타일을 갖고 싶어 일본인 이발소까지 찾아갔던 것이다. 단발령을 강요할 필요도 없는, 못 말리는 친일파가 될 조짐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