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가의 정통' 효창공원 재구조화 논의 난항

친일청산 실패로 묘역 앞에 지어진 운동장, 한 공간에 있는 묘역과 운동장 반드시 분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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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준(ocsi818)등록 2023.04.14 15:02
대한민국 100년되던 2019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는 전국거주 만 19세 이상 국민 1004명을 대상으로 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조사' 결과보고서를 발표했다.

"항일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1, 2, 3순위 응답'을 합한 결과는 1위 김구(38.0%) 2위 안중근(33.4%) 3위 윤봉길(26.3%)로 나타났다.

국민들이 항일독립운동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첫 손에 꼽는 이들의 묘역이 공교롭게도 모두 용산구 효창공원에 마련돼 있다. 우연이 아니다. 해방 후 환국한 독립운동가들이 순국선열 묘역을 조성한 첫 장소기 때문이다.

독립 후 1년이 조금 안 된 1946년 7월 6일, 효창공원에 삼의사 묘역(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묘역과 안중근 의사 묘역자리)이 조성된다. 관련 내용을 보도한 1946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 "祖國光復(조국광복)에 바친 세血祭(혈제)"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삼(三)열사의 국민장은 서울의 성지 효창원에서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오세창·이시영·여운형 제씨(諸氏)와 한국민주당·조선공산당·한국독립당·민전·대한독립촉성국민회·전평·부총·애국부인회·여자국민당 등 각 정당·단체 대표자와 각 정회, 각 학교의 대표자들 5만여 명이 참예하여 하오 1시부터 엄숙히 거행되었다.
 

삼의사 국민장을 보도하는 1946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해방 후 첫 국민장이 거행된 효창공원 묘역 조성에 진영과 이해관계를 초월해 거물급 인사들과 정당 및 사회단체가 대거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효창공원에 묘역이 자리한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 선생의 외아들 차영조씨는 "효창공원은 해방 후 백범 김구를 필두로 임시정부 요인들이 직접 독립유공자를 모신 공간"이라며 "이곳이야 말로 민족정기의 원조,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효창공원이 갖는 정통성을 강조했다.

독립국가의 정통을 짓누르며 자리한 운동장

삼의사 묘역에 이어 임시정부요인묘역(석오 이동녕, 동암 차리석, 청사 조성환의 묘역)이 1948년 9월 조성됐고 묘역 조성을 주도했던 백범 김구 묘역도 이듬해 7월 이곳에 마련된다.

해방 독립국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자리한 묘역 바로 앞에 운동장이 지어진 건 1960년이다. 한국은 제 1회 아시안컵 축구대회(1956년 9월 개최) 우승국 자격으로 1960년 예정된 제 2회 대회를 유치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운동장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효창운동장이 지금 자리에 지어졌다.

하지만 아시안컵 축구대회와 별개로 운동장 건립시도가 이미 있었다. 1956년 6월 3일자 「조선일보」 기사 "당국처사(當局處事)는 국민(國民)을 모독(冒瀆)"은 "오래전부터 우이동에다 큰 운동장을 만들고자 설계하였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체육회에서도 모르게 효창공원에 운동장을 만들기 위하여 공병대에서 공사에 착수하였다는데 하필 혁명선열들의 묘지를 이장하면서까지 효창공원에다 만들어야할 이유를 알 수 없다"라고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일제고문이 만든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채 살았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이 "효창공원을 통곡함"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불도저 앞에 드러누우며 공사를 막아선 게 이때다. 논란이 이어지자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공사중지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결의한다.

195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 사설 "先烈墓地(선열묘지) 保存(보존)에 誠意(성의)를 다하라" 역시 "고 김구선생을 비롯하여 전 임정요인 몇분과 순국의사 몇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서울 효창공원에 공설운동장을 신설하기 위하여 그 분묘를 이장할 계획이 서울특별시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 (중략) 더구나 대한체육회로서는 방금 상도동에 올림픽 대회도 개최할 수 있는 규모로 오십만평의 종합경기장을 설치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고 효창공원에 대하여는 이렇다할 찬성의 의사가 표명된 바도 없는 터이요"라고 운동장 건립의 부당함을 강조한다.

무산됐던 운동장 건립 시도는 제 2회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명분으로 결국 지어져 1960년 10월 완공, 63년 지난 지금까지 묘역 앞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서울에는 이미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이 마련돼 있었기에 이를 보완해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치를 수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체육계에서 우이동, 상도동 등 지역까지 특정하며 종합운동장 마련을 위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기에, 독립운동가 묘역 앞이라는 운동장 입지는 더욱 석연치 않다.
 

효창공원 묘역 앞에 지어진 효창운동장. 일대가 파헤쳐져 있다. 1965년 전경 ⓒ 심산김창숙기념관 홍소연 전시실장

 
'서울특별시립' 효창운동장, 임흥순 서울시장은 누구?

묘역 앞에 자리한 효창운동장은 '서울특별시립'으로 지어졌다. 역대 서울시장을 소개하는 시 홈페이지에도 효창운동장 건립을 제 9대 임흥순 시장의 업적(주요시책)으로 기재해 두었다.

서울시 홈페이지 '역대 서울시장 소개'란에 소개된 임흥순 시장. 효창운동장 건립(60년 아시아 축구대회 대비 효창운동장에 축구장개설)을 주요시책으로 기재해 두었다. ⓒ 서울시 홈페이지 갈무리


임흥순 시장은 1924년 6월 조직된 동민회(同民會) 회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동민회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6,000여 명을 웃도는 재일 한국인이 학살되고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으로 국내 농촌사회가 몰락하는 등 반일 감정이 고조되자 이를 압살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대표적 친일 단체에 꼽힌다.

1941년 9월부터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서 활동하며 유기(놋그릇) 1200여 점을 모아 해군무관부에 헌납하고, 청년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학생 급속정신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 태평양전쟁에 적극 협력한다.

1949년 6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같은 해 8월 불기소 처분을 받아 풀려났고 이후 국회의원,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 4·19혁명으로 서울시장에서 물러났으며 3.15부정선거사건, 장면부통령저격사건에 가담한 혐의가 밝혀져 1960년 5월 구속 수감된다.

심산김창숙기념관 홍소연 전시실장은 "우리사회 전반의 원죄는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해방 후 일제잔재를 제때, 제대로 청산했다면 효창공원의 묘역을 폄훼하는 정치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위치에 운동장이 지어질 일도 애초에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논란 끝에 효창공원 독립운동가 묘역 앞에 운동장이 지어졌다. ⓒ 효창독립100년메모리얼프로젝트

   

효창공원 논의 표류 중, 운동장 입지문제 완전히 해결해야

물론 제 2회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개최하고 우승컵을 들어올린 효창운동장은 한국스포츠의 영광이 배어있는 장소다. 이는 서울시가 2013년 효창운동장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해방 후에도 권세를 누리는 사회가 열린 탓에, 순국선열 묘역 앞에 운동장이 지어져 묘역의 '보훈가치'와 운동장의 '문화체육가치'가 한 공간에서 충돌하는 모양새다.

이에 대한민국 100주년이던 2019년 4월, 효창공원을 상징성에 걸맞은 공간으로 조성하는 재구조화 공론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효창독립 100년공원 조성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등 표류 중이다.

보다 근원적 문제는 독립운동가 묘역 앞에 지어진 운동장 입지문제를 해결할 비전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운동장이 지어질 당시 상황과 맥락을 짚어본다면 현 위치에서 운동장을 완전히 분리하는 게, 해방 후 순국선열 묘역이 처음으로 조성된 장소 효창공원의 위상에 걸맞다.

앞서 언급한 문화체육관광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조사'결과 국민의 80.1%는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30.8%, 별로 청산되지 않았다 49.3%)"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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