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일왕1946년 11월 3일, 평화헌법에 서명하고 있는 히로히토. 평화헌법은 맥아더가 초안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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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2차 대전 뒤엔 국제전범 평가
제2차 대전 뒤에 히로히토는 국제적으로 전범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946년 1월 20일자 <조선일보> 1면 하단 기사는 도쿄 발 전보를 근거로 "동경 내전(來電)에 의하면 호주 급(及, 및) 신서란(新西蘭)은 천황을 일본의 주요 전쟁범죄인으로 지명하엿다고 전한다"라며 "그러고 작년 10월 중국도 천황을 전쟁범죄인 명부에 기입하엿다고 보도하엿다"라고 설명했다. 호주 및 뉴질랜드와 더불어 중화민국이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규정했다는 보도다.
도쿄재판으로 불리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재판장인 윌리엄 웹(William Flood Webb, 1887~1972) 역시 생각이 동일했다. 도쿄재판이 마무리되던 시기에 발행된 1948년 11월 14일자 <경향신문> 1면 중단에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이 기사는 일왕을 일황과 일제(日帝)로 부르면서 "국제전범재판장인 호주의 윌리암 웨브 씨는 12일 '일황 유인(裕仁)은 그의 정치적인 책임은 면제되여 있으나 일본의 침략전쟁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라고 한 뒤 "씨(氏)의 이러한 견해는 일제의 지위를 명백히 하는 것이 필요한 전범재판법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제2차 대전 직후의 국제사회는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인식했다. 이 시절에는 히틀러·무솔리니 사진 옆에 히로히토 사진이 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히로히토만 책임을 모면했다. 그 본인뿐 아니라 후손들도 여전히 일본 왕위를 잇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히틀러·무솔리니와 달리 히로히토가 패전 후에 생명은 물론이고 정부 시스템까지 지킨 사실과 무관치 않다. 비록 패전은 했지만 그를 옹호할 정치세력이 살아남은 것이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훨씬 더 중요한 두 가지 이유는 미국의 입장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가급적 기존 체제를 이용해 일본을 지배하는 게 유리했다. 1945년 9월 6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 방침'은 '천황을 포함한 일본 정부기구 및 기타 기관을 통해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방했다. 일왕을 앞세워 일본을 지배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기 때문에 히로히토에게 엄정한 잣대를 적용하기가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중국 국공내전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을 앞세워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던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중국 대신에 일본을 앞세워 소련은 물론이고 북한·중국까지 견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런 변화는 미국이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기보다는 동맹국 국가원수로 대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히로히토는 전범이다'라는 외침이 국제사회에서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