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배우 김기수대통령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인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김기수. 그는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내 주먹을 사라>에서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와 함께 주연을 맡으면서 세계챔피언에 오른 뒤 영화배우로 데뷔하는 루트를 개척했다.
한국영상자료원(영화 영상 캡쳐)
그에 비해 야구가 가진 매력이란 보잘것없었다. 규칙은 어렵고 경기방식은 난해하기에,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학습의 과정이 필요했다. 인터넷도 없고 야구 관련 책이나 잡지도 없던 시절, 야구라는 종목에 대해 설명해줄 만한 '동네 형들'도 대부분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학교 출신들뿐이라 공부하느라 바빠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경기는 길었고, 중계방송이 흔치 않았으며, 기껏 라디오 중계방송의 말로 하는 설명으로는 경기 양상을 상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싸우는 상대 역시 경북고 아니면 선린상고, 인천고 아니면 경남고 식이라 그 학교를 졸업한 가족이라도 있지 않는 한 굳이 응원할 이유도 없었으며, 최소한 일본놈 서양놈 쥐어패는 재미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복싱과 레슬링 밀어낸 야구
하지만 1970년대 초, 고교야구의 인기가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을 압도하는 대반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과 1970년대 중반 사이의 10여 년간 고교야구대회의 입장객 수는 서너 배씩 증가했다.
고교야구 소식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확장되면서 최초의 스포츠 전문지로서 1969년 창간 당시 2만 부를 발간하던 <일간스포츠>가 1976년에는 80만 부를 찍어낼 정도로 팽창했다. 각 종합일간지의 스포츠면 비중도 꾸준히 확대되었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야구가 처음으로 최고 인기 종목으로 올라섰으며, 중계방송의 빈도 역시 프로복싱과 프로레슬링을 넘어섰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발언 때문에 프로레슬링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프로복싱에서 더 이상 세계챔피언이 배출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한국인들이 일본과 서양에 대한 열등감을 모두 해소해버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국내파 프로레슬러 장영철이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발언을 했던 것은 김일이 귀국한 직후인 1965년 11월이었고, 당연하게도 김일의 전설적인 국내 활동이 이어진 것은 대부분 그 뒤의 일들이었다.
프로복싱에서는 김기수의 챔피언 등극을 지켜보며 복싱에 입문한 '김기수 세대'들이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챔피언 타이틀을 수확하기 시작했는데, 1974년 홍수환(WBA 밴텀급), 1975년 유제두(WBA 주니어미들급), 1976년 염동균(WBC 슈퍼밴텀급), 1978년 김성준(WBC 라이트플라이급), 1978년 김상현(WBA 슈퍼라이트급), 1979년 박찬희(WBC 플라이급) 등이 그들이었다.
사실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은 1970년대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세대교체와 후진 양성에 성공한 프로복싱과 김일 한 사람의 나이 들어감과 더불어 노쇠한 프로레슬링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극적인 몰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1960년대 중반의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지위를 조금씩 잃어갔을 뿐이고, 그것은 스포츠의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진 성장과 대비된 것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교야구의 급격한 부상 외에도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에서 본격적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폭발력
그렇다면, 야구로 국민적인 관심이 옮겨가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경기 방식이 난해하고 애국심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계기도 약한 데다가 특히 실업야구에 비해 기술적인 수준도 높지 못한 고교야구에 집중적인 관심이 쏟아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