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학이 기관총 2정을 기증했다는 신문 기사.
전갑생
그런 반민족행위 덕분에 도의원에도 임명되고 표창도 많이 받았다. 전쟁 지원 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 등에서 감투도 받았다. 그가 일제에 바친 것들, 그가 일제로부터 받은 것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다.
1938년부터 천만장자로 불렸던 그가 1949년에는 '과거의 광산왕'으로 불렸다. 이때는 여전히 광산업계 지도자였다. 그러다가 1955년에는 '왕년의 광산왕'으로 불렸다. 해방을 전후한 시점에 고리대금업에 좀 더 치중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업종에서 여전한 재력을 과시했다면 굳이 '과거의 광산왕'이니 '왕년의 광산왕'이니 같은 표현이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1945년 해방 뒤부터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 8·15를 계기로 그의 재력에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쇠락
그가 쇠락의 길에 접어든 것은 친일파였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1949년에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입건되기는 했지만, 여타 친일파들처럼 그 역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가 기울게 된 것은 고리대금업을 한창 하던 해방 직후에 인플레이션이 심해진 것과도 무관치 않지만, 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금(金)이라는 글자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최창학은 동학혁명 3년 전인 1891년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서희의 강동 6주 및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구성군이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광구 100여 곳을 보유한 금광왕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906년부터 대동학교와 향산학교에서 수학하다 1912년 사립 진명학교를 졸업했다", "10여 년간 탐광 활동을 한 뒤 1923년 평안북도 의주군의 삼성금광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등의 문장으로 설명한다. 만 21세 이후부터 10여 년간 금을 찾아다니다가 32세부터 금광 경영자가 됐던 것이다.
이런 과정이 일제강점기 평안북도에서는 다소 극적으로 소문나 있었던 듯하다. 구성군 근처인 운산군에서 출생한 언론인 리영희(1929~2010)의 말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단일 매장량으로는 세계 최대라는 운산금광이 있는 데서 태어난 리영희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담집인 <대화>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에 세 사람의 거부가 있었어요"라며 "친일파의 거두였던 한상룡과 박흥식 그리고 최창학이야"라고 한 뒤 최창학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괄호 속 내용은 원문 그대로다.
이 사람은 일자무식에다 장돌뱅이(당나귀에 잡동사니를 싣고 평안북도의 장터를 돌아다니던 사람)인데,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금광맥을 발견하는 횡재를 했다고, 그 후부터 돈을 모아 조선의 광산왕이 됐던 사람이야.
일자무식이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었지만, 이런 설화는 최창학이 금광왕이 되는 과정을 더욱 극적으로 빛내주는 측면도 있다. 탐광 활동을 하다가 금맥을 만나 주요 재벌이 된 그가 기울게 된 것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별장을 찾아온 손님과 관련이 있다. 그 손님의 성에도 금(金)이 들어 있었다. 그날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귀국해 죽첨장(경교장으로 개칭)에 찾아온 백범 김구(金九)가 바로 그 손님이다.
소문난 친일파인 최창학이 독립운동 지도자에게 별장을 내준 것은 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1970년 광복절에 발행된 <조선일보> 5면 전면 기사는 "광산왕인 최창학이 독립투사이던 김석황씨의 권유로 김구씨에게 내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2003년에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가 펴낸 <비운의 역사현장: 아! 경교장>은 "(임시정부환국 환영)준비위원장인 김석황과 최창학의 인간관계가 작용하여 결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라고 알려준다.
김석황(1894~1950)은 김구보다는 18년 뒤이고 최창학보다는 3년 뒤인 해에 김구의 고장인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2·8 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등에 관여하고 자금 모집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때문에 징역 10년을 살았다. 김구와 인연이 있는 김석황의 권유를 받고 최창학이 집을 내주게 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