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올림피언 박봉식이화여중에 재학중이던 박봉식은 원반던지기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는 기사를 통해 화제가 되며 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지만, 그 기사는 오보였고 올림픽에서의 성적도 초라했다. 하지만 그 오보 덕분에 한국 여성의 올림픽 진출이 조금이나마 앞당겨진 것도 사실이다.
대한체육회
하지만 그 선수들 중 올림픽에서 실제로 메달권에 근접한 선수는 없었다. 박봉식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18위에 그쳤는데, 자기 최고기록에 3미터 이상 못 미친 부진(33.80m)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개인 최고기록인 37.08m가 세계신기록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직전 1936년 대회 우승자 독일의 지셀라 마우어마이어(Gisela Mauermayer)의 기록이 이미 47.63m였으며 박봉식의 기록 37.08m는 당시에 대입해도 6위에 불과했다. 또한 개최지마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치러지는 장거리 도로 사이클 경기의 경우 애초에 '세계기록'이라는 개념 자체가 큰 의미가 없었으며 당시 한국은 육상 마라톤 코스인 42.195km를 정확히 계측할 기술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100km의 도로 사이클 구간 측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더기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고 보도된 한국의 도로사이클 선수들은 대부분 국내 예선과는 완전히 다른 경사도와 도로환경, 거리를 달려야 했던 실제 올림픽 경기에서 완주조차도 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63년 대전고에 재학 중이던 원신희 선수의 기록은 '주니어 세계기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세계신기록'이라고 표현해 결과적으로 성과를 과장했다. 그 밖에도 통산기록과 시즌기록, 주니어기록과 시니어기록, 공인기록과 비공인기록을 혼동하거나 당시의 세계기록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수 년 전의 세계기록을 넘어선 것을 두고 '세계신기록 수립'이라고 표현하는 기사들이 꽤 많았다. 그런 부정확한 보도들은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대회 직전에 집중되었고, 대중의 기대를 한껏 부풀린 다음 무참히 깨뜨렸다.
그리고 그런 몇가지 근거가 없거나 혹은 빈약한 자신감은 1964년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고조되었고, 정부 역시 동조했다. 1948년과 1952년 올림픽 역도 동메달리스트이며 태릉선수촌장을 지낸 김성집 선생은 당시 정부와 체육회는 자체적으로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증언했다. 복싱, 레슬링, 유도, 역도에서는 메달 획득이 가능하며 마라톤과 사격, 사이클은 상위권(6위 이상) 진입이 유력하고 축구, 농구, 배구, 승마, 수영도 예선 통과는 가능하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시차가 적어 선수들의 피로감이 적고 재일교포 사회의 협조 아래 친숙한 식사와 편안한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으며, 군사정변 이후 강화된 국가적인 지원 속에 경기력이 향상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쿄 올림픽의 실패, 그리고 방향전환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 대회에서 한국 선수단의 성적은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에 그쳤고 축구, 농구, 배구 등 국민적 관심과 기대가 높았던 구기종목들에서도 남녀를 통틀어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축구 3패, 농구 9패, 여자와 남자 배구가 각각 5패와 9패였고 육상은 마라톤 11위 이상훈 외의 전원이 중도 기권하거나 예선 탈락했다. 오히려 정부 수립도 되기 전, 혹은 전쟁 중에 참가했거나 며칠 씩 뱃멀미에 시달리며 출전했던 이전 대회들에 비해서도 부진한 성적이었던 셈이다.
특히 북한의 출전이 좌절되면서 남북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주최국인 일본이 16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종합 3위에 올라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과 대조되면서 국내에 전해진 충격은 더욱 컸다. 대회 직후 선수들의 집에 돌이 날아드는 일이 속출했고 한국올림픽위원회(KOC)와 대한체육회부터 축구협회, 농구협회, 배구협회, 육상연맹 등 각 경기단체들에서 임원총사퇴나 회장 사임이 이어졌다. 국회에서도 올림픽 대표팀의 부진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는데, 특히 야당 의원들은 선수단 규모에 비해 성적이 저조했다는 점과 마라톤 종목 선수들이 중도에 포기한 점, 그리고 구기종목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점을 비판했고 답변에 나선 문교부장관도 선수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부족했고 정보도 부족했다며 동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