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언론 인터뷰가 열리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하며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2015.4.7
이희훈
일반학 속에는 '월남 소개 및 교훈' 외에도 독도법(지도 해독법) 프로그램, 함상생활 프로그램, 헬리콥터 탑승 훈련 프로그램, 예방의학 프로그램도 있었다. 20시간·24시간·54시간 중에서 '월남 소개 및 교훈'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지 않았다.
또 교육 내용이 부실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참전 군인들과의 인터뷰에 기초한 위 논문은 "그 내용은 빈약하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다"라면서 맹호부대 기갑연대 작전주임이었던 이효 예비역 소령의 진술을 소개한다. 논문에 소개된 이효 소령의 진술을 요약하면 이렇다.
'강원도 홍천에서 사전 교육을 받을 때, 베트남 여성들은 모두 삿갓을 쓰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베트남 항구에 상륙하기 직전에 저 멀리 부두에 운집한 인파를 바라보니 모두 다 삿갓을 쓰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니까 남자는 드물고 여자가 많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별에 관계없이 삿갓을 다 착용한다는 사실을 상륙 직후에 알게 됐다.'
상륙 직후에 금방 알 수 있는 지식이 사전 교육 때 잘못 제공됐다. 교육 프로그램이 얼마나 엉성하게 준비됐는지를 알 수 있다.
백마부대 29연대 인사과에서 근무한 김천수 예비역 병장은 사전 교육 때의 강의 내용은 "주로 장교들의 작전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한다. 베트남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소양 교육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베트남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참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군 지도부는 이런 프로그램을 근거로 민사 작전의 성공을 자평했다.
"저희 나라 위해 싸우다 보면..."
그런 자평이 나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당시의 한국 사회를 지배한 '개발주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다. 채명신 장군을 취재한 위 기사에도 나타나듯이 한국국은 "의료반 활동, 친선 행사, 건설 및 보수 공사" 같은 활동을 수행했다. 베트남에 대한 이 같은 물질적 지원이 위와 같은 자평을 도출한 또 다른 이유였다.
한국군 지도부는 물질적 지원을 통해 베트남 민중을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베트남 현지에 전략촌이나 신생활촌 프로그램을 운영한 미군의 태도가 한국군에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군의 민사 작전이 미군을 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국군이 미군의 재정 지원을 받아 그런 활동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질적 지원에 편중돼 심리적 접촉에 소홀했던 한국군 민사 작전은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응우옌티탄 같은 피해자들이 5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문제 해결을 촉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