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서 찍은 고 배춘희 할머니.
김종성
이번 사건의 원고인 배춘희 할머니는 3·1운동 4년 뒤인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조선여자근로정신대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돈을 벌 생각에 친구와 함께 자원했다.
하지만 그가 가게 된 곳은 근로정신대가 가는 강제징용 현장이 아니었다. 위안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중국 만주로 이끌려가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당했다.
1993년에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한 고노담화에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라는 대목이 있다.
돈을 벌 목적으로 근로정신대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여성을 위안부로 전락시킨 것은 '본인의 의사에 반한 모집'에 해당한다.
그가 위안소가 아닌 근로정신대로 끌려갔어도 노예 생활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신대의 실체를 몰랐고 자신이 정신대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의 일본군 군영에서 성노예 생활을 하게 됐다.
그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 뒤에도 곧바로 귀국하지 못해 객지인 중국을 여기저기 전전했다. 그러다가 1951년, 드디어 중국을 떠나게 됐다. 그렇지만 그가 가게 된 곳은 고향이 아닌 일본이었다. 한국전쟁 중인 그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1981년 무렵까지 묶여 있었다.
그는 밝고 명랑했다. 항상 남을 웃기고 즐겁게 해주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위안부로 끌려간 뒤에 약 40년 동안 중국과 일본을 전전하면서도 에너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동력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인 1990년대에 그는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 할머니들과 연대했다. 그들과 함께 위안부들의 한을 풀기 위한 싸움에 가담했다. 그러던 중에 생긴 일이 1995년 7월 18일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발족이다.
아시아여성기금으로 약칭되는 이 단체는 민간 기금을 모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임무를 띠었다. '일본 국가'가 아닌 '민간'이,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주고 이 문제를 무마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중이 담긴 단체였다.
일본 정부의 그 같은 처사는 배춘희 할머니를 격분시켰다. 그런 식으로 위안부들의 입을 틀어막고 투쟁을 약화시키려는 것에 그는 분개했다. 생활고에 찌들려 위로금에 손길이 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일본 정부에 대한 그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 분노가 1997년 9월 6일자 <한겨레> 기사인 '내 평생 흘린 피눈물이 얼만데'에 소개됐다. 이 기사는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경기도 광주군 나눔의집은 요즘 분노와 시름이 교차한다"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국가배상을 요구하며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집회를 가져온 게 벌써 6년째"라고 한 뒤, 1997년 초에 피해자 7명이 아시아여성기금 위로금을 수령한 일로 인한 배춘희 할머니의 허탈함을 이렇게 묘사했다.
"노래와 유머로 늘 주위를 웃기는 오락부장 배춘희(74) 할머니의 입가에도 한동안 웃음이 사라졌다."
1997년 8월 8일자 <경향신문> 18면에도 "오락부장으로 스타 의식이 강한 배춘희 할머니"라는 표현이 있다. 그렇게 밝고 명랑했던 그 역시 동료들이 위로금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해 했다. 그는 보다 많은 동료들과 힘을 합쳐 계속 싸우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