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을 광화문이나 용산으로 옮기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용산의 경우에는 국방부 청사 등이 검토되고 있다. 청와대 이전 태스크포스(TF)가 이 문제를 집중 검토할 것이라고 보도되고 있다.
과거 같으면 이런 논의는 천도 문제로 해석되기 쉽다. 군주의 거처나 집무실을 옮기는 것을 천도라고 했다. 용산은 서울특별시 안에 있지만 한성부(한양) 사대문 밖이기 때문에, 100년 전 사람들 같았으면 이 문제를 천도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용산의 과거
용산이 지금과 비슷하지만 약간 낮은 수준의 관심을 받은 것은 고려 제15대 주상인 숙종 때였다. 고려 건국 177주년인 1095년에 만 13세 된 어린 조카인 헌종을 압박해 왕위를 차지한 뒤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만 41세의 숙종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군주 생활을 시작했다.
동아시아 최강국인 거란족 요나라가 약해지고 여진족이 강성해지는 과도기였다. 그래서 외교 노선에 대한 고심이 특히 깊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이복동생 왕수로 인한 고민 역시 깊었다.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이 시기에는 왕권이 형제에게 계승되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왕수의 동태를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숙종은 음력으로 숙종 4년 11월 3일(양력 1099년 12월 27일) 왕수에게 역모죄를 적용했다. 그를 경산부(경북 칠곡)로 유배 보냈다. 그렇게 해서 한시름 놓은 뒤에 추진한 것이 개경 남쪽에 남경이라는 소경(小京)을 재설치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인 제11대 문종이 1067년에 설치했지만 오래 못 가고 폐지된 남경을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4대의 차이나 있었던 것은 문종 뒤에 문종의 두 아들인 순종(제12대)과 선종(제13대), 문종의 손자이자 선종의 아들인 헌종(제14대)이 왕위를 이은 뒤에 문종의 또 다른 아들인 숙종이 즉위했기 때문이다.
소경 역시 왕의 거점이었다. 그러므로 숙종이 남경 부활을 추진했다는 것은 이 시점에 상당한 힘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 힘을 바탕으로 왕권강화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남경 복원을 건의한 인물은 김위제(金謂磾)였다. 김위제는 고조선 국교인 신선교의 전통을 잇는 도사였다. <고려사> 김위제 열전에 따르면, 김위제는 개경-서경(평양)-남경의 트리오 체제를 건의했다. 그렇게 되면 70개 국가가 고려 임금에게 복속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조선상고사>에서 역사학자 신채호는 김위제가 고조선 역사서인 <신지>를 근거로 그런 예언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숙종의 명령을 받고 1101년에 남경 후보지를 물색한 책임자 중 하나가 윤석열 당선인의 조상이자 동북 9성 축조의 주역인 윤관이다. 그리고 윤관 등이 돌아본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용산이었다.
<고려사> 숙종세가(숙종 편)에 따르면, 윤관 등은 "신들이 노원역·해촌처·용산처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았지만 도읍을 세우기에 부족했습니다. 다만, 삼각산 면악 남쪽의 산세와 물 흐름이 옛 문헌에 부합할 뿐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지금의 노원, 도봉산 밑, 용산은 부적절하니 청와대 쪽에 남경을 세울 것을 건의한 것이다. 윤관 등이 용산처로 호칭한 것은 이곳이 향·소·부곡 같은 특수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윤관 등이 말한 '용산은 부적절하다'는 의미는 남경 중심부로 부적절하다거나 남경 궁궐 부지로 부적절하다는 의미였던 듯하다. 숙종세가에 따르면, 1102년에 남경의 구역 범위를 결정할 때 용산이 남경의 남쪽 끝으로 설정됐다. 용산이 남경의 중심부는 아니지만 남경의 울타리 안으로는 포함됐던 것이다.
그렇게 남경에 포함되긴 했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용산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남대문 바깥에 놓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적·행정적 위상이 이전보다 낮아졌다. 하지만, 국가재정 상의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한성부와 한강을 잇는 이곳에 군수품 관청인 군자감의 창고를 설치했다.
그런 의미에 더해, 조선 후기인 19세기에는 군사적 의미가 크게 부각되면서 재정적 의미와 겹쳐졌다. 군인 급료의 부실 지급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1876년 강화도조약 및 시장개방에 대한 저항으로 촉발된 1882년 임오군란을 청나라 군대가 진압한 뒤로 '군사+재정'의 의미가 강해졌다.
청나라 군대는 남대문 남쪽인 용산에 주한청군기지를 세우고 이곳을 근거지로 도성을 위협했다. 민란을 진압해주겠다며 인천에 상륙해 용산까지 들어온 이 군대는 거점을 이곳에 두고 1894년까지 내정간섭을 실시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용산은 외국군 주둔 기지의 성격을 갖게 됐다. 1904년 이래로 일본도 똑같은 장소에서 주한일군기지를 운영했다. 한성부와 한강의 길목을 차단하고 도성을 압박할 수 있는 용산의 지리적 의미를 일본도 활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