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일본군만리창으로 상륙한 일본군. 청일전쟁 수행기간 동안 용산은 일제의 조선강압 및 전쟁수행과 후방 물자수탈기지로 활용 되었음.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 용산은 주한미군기지로 각인돼 있지만, 예전에는 주한청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1882년에 고종 임금의 요청을 받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가 이곳 용산에 주둔했다.
청군은 임오군란의 주역인 한양 주민들과 군인들을 완전히 제압하고자 이들이 지지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청나라로 납치하는 기상천외한 정변을 저질렀다. 이 사건이 발생한 곳도 용산이다.
구한말 학자인 황현의 <매천야록>은 청나라 군대 수장인 마건충이 흥선대원군을 용산 주둔지에 초청한 뒤 납치했다고 말한다. 음력으로 고종 19년 7월 13일자(양력 1882년 8월 26일자) <고종실록>도 피랍 장소가 용산 둔지미(屯地尾)라고 말한다. 훗날 미군기지가 생길 곳에서 대원군이 변을 당했던 것이다.
주한청군기지에서 주한일군기지로
그렇게 주한청군기지가 된 곳이 뒤이어 주한일군기지가 됐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의 일이었다. 러시아와의 승부를 위한 군사기지 확보를 목적으로 용산이 선정됐던 것이다.
지난 2월 7일 발행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제1권은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 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 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 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고 설명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용산 하면 미군기지가 떠오르지만, 1904년 이후로 반세기 동은 용산 하면 일군기지가 연상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