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의 이백윤 후보월세 45만원의 원룸이 그의 베이스캠프다.
민병래
피케티가 만든 세계 불평등연구소의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상위 10%의 부가 전체의 58.5%에 이르고 하위 50%는 고작 5.6%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런 심각한 불평등 탓에 한국인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제일 높고 노인 빈곤률과 저출산 또한 1등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백윤은 이런 모순을 노동 현장에서 온몸으로 체험했다.
동희오토에서 만난 비정규직의 민낯
"제가 2005년 서산에 있는 동희오토에 들어갔어요. 기아자동차는 동희오토에게 모닝의 생산을 통째로 위탁했는데 이게 완성차에서 첫 시도였죠. 기아차 입장에선 생산원가를 낮추고 직접고용도 줄이니 꿩 먹고 알 먹고였죠. 그런데 동희오토는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열 명이 넘는 소사장에게 라인별로 위탁을 주고 모든 생산직은 비정규직으로만 뽑았어요. 저는 법적으로 동희오토가 아니라 소사장 중 한 명과 근로계약을 한 거죠. 하청에 하청, 위탁에 위탁, 그 끝에 제가 서 있었던 거죠."
96년도에 대학에 들어간 이백윤은 3학년 때 문과대학생회장으로 40여 일간 본관 점거 농성을 주도했다. 학교가 과별 모집이 아니라 어문학부나 인문학부 같이 광역단위로 학생을 선발하겠다고 개편안을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세계화 물결을 따라 대학도 혁신해서 경쟁력을 갖춰야 하고 그 지표는 취업률이라는 논리가 대학을 포위하던 때였다.
이백윤은 이렇게 되면 역사학이나 철학 같은 학문은 학생에게 외면받고 인문학의 위기가 올 수 있다며 반대 투쟁을 조직했다. 같이 싸움을 했던 정경대는 학교안을 받고 말았는데 그가 싸움을 이끌었던 문과대는 학교의 결정을 보류시켰고, '향후 모집단위를 바꿀 때는 교수와 학생이 참여해서 결정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때 이백윤은 어렴풋하게나마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열 동강 백 동강 내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이백윤은 동희오토에서 그 실상을 뼈저리게 접한 것이다.
"기자님, 혹시 주야 맞교대를 해보셨나요. 그 당시 자동차업계는 어디나 일주일씩 주야 맞교대를 했어요. 입사해서 처음 밤샘 근무를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오니 물먹은 솜처럼 몸은 가라앉는데 좀체 잠이 안 오더라고요. 빨리 잠들어야 밤에 근무를 나가니 잠들자 잠들자 되뇄는데 잠이 더 안 왔어요.
그렇게 일주일을 헤매니 눈은 퉁퉁 붓고 핏발이 섰죠. 겁이 났어요. 작업도 엄청 고됐어요. 컨베이어벨트에 2분 간격으로 차체가 한 대씩 흘러가는데 저는 엔진을 얹으면서 다른 업무를 같이 했어요. 숨돌릴 틈이 없었죠. 나중에는 1분에 한 대까지 라인의 속도가 빨라졌어요. 행동과학자들의 주장으로는 한 시간에 72대까지 가능하다나?"
동희오토의 이런 생산성은 완성차 노동자보다 몇 배 높다고 소문이 났다.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이라는 생산모델을 정립, 재고없는 현장을 구축했다는 토요타가 견학을 왔을 정도였다.
정부도 이에 호응, 2014년 제38회 국가생산성대상에 선정된 동희오토에게 산업자원부장관상을 주었다. 또 2017년에는 제41회 국가생산성대회 스마트혁신부문에서 국무총리표창을 안겨주었다. 하청에 하청, 생산직은 비정규직으로만 채워져 있고 월급은 완성차 노동자의 절반 언저리인 사업장이 혁신기업으로 대우받은 것이다.
내일 새벽 열릴 선대본 회의도 감안 한 시간만 하겠다는 인터뷰는 금세 시간을 넘겼는데 얘기는 무르익어가고 나눠야 할 얘기는 산더미였다. 마음은 급했지만 방이 서늘해 따뜻한 커피 한잔을 청했더니 믹스커피도 없고 포트도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밥을 지어 먹을 시간도 없고 유세차에서 동행팀과 김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니 라면조차 없단다. 아닌 게 아니라 냄비며 그릇들은 바짝 말랐고 먼지마저 수북하다. 냉장고에 있는 건 생수 한두 통이 전부일 듯.
구치소에서 나오면서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다
"제가 사회주의자가 된 건 서산 구치소에서 나올 무렵이었어요. 그전에는 노동자의 어려움에 동참한다는 생각 정도였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당해보니 고쳐서 쓰기엔 자본주의가 너무 악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로계약도 나중에는 1년 단위가 아니라 3개월씩 쪼개기로 하는 경우까지 생겼어요. 이 정도면 비정규직의 지존 아닌가요?"
"3개월 단위는 정말 심했네요. 그런데 후보님은 구속도 되었나요."
"네, 해고되고 구속됐었죠."
동희오토는 설립 당시에 이미 노동조합을 서류상으로 만들어 민주노조가 들어설 자리를 봉쇄했다. 이백윤과 동료들은 움직였다. 비정규직 철폐를 비롯, 작업 속도, 식당 밥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회사는 이백윤을 주목했고 그가 대학 입학 사실을 빼고 이력서를 썼다고 해고 조치를 했다. 그와 함께 활동한 21명의 동료들까지 한꺼번에 잘랐다. 곧바로 해고 무효 투쟁이 시작되었다.
현장 진입을 시도하고 이게 막히니 차 트렁크에 몸을 숨겨 들어가고 회사 뒷산으로 발전기랑 확성기를 메고 올라가 외치기도 하고... 나중에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현대차 양재동 사옥으로 가 120여 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거기서 많은 곤욕을 치렀다. 회사의 용역들은 호수로 물을 뿌려대고 봉고차를 바짝 들이대 매연을 뿜고 긴 장마에 천막이라도 치려면 걷어내고... 그래도 버티며 정몽구 회장 면담을 요구한 게 급소였는지 동희오토는 복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백윤은 투쟁 중에 공무집행방해·집시법위반·도로법 위반 등 10가지가 넘는 죄목으로 2010년 10월 구속되었다.
전남 고흥에서 자란 이백윤은 중고등학교 시절 겉표지가 드러나지 않게 달력으로 감싸인, 광주항쟁 관련 책들을 다락에서 펼쳐봤다. 그는 "나중에 대학 가면 데모는 한 번 해봐야지"라는 생각을 그때 마음에 쟁였다.
아버지는 평생 건설노동자로 살면서 몸져눕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포장마차, 두유 배달, 식당의 설거지 일로 아버지의 빈 자리를 메웠다. 이백윤이 대학을 마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를 바랐건만 학생운동에 노동운동 게다가 구속까지 되고 말았으니... 면회를 오신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은 괜찮니, 하고 물으셨다.
이백윤은 감옥 안에서 인생의 방향을 깊게 고민했다. 집행유예로 출소한 후 그는 사회주의변혁노동자당에 들어갔다. 현장실천 조직을 만들고 충남지역의 당 대표를 맡았다. 그게 2014~2015년 언저리였다. 2017년부터는 서산에서 3년간 산업폐기물매립장 반대투쟁을 했다. 그 후 이번 대선을 맞아 사회변혁노동자당과 노동당이 합당하여 만든 '노동당'의 대선후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