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일시 완주로 자존감 키우기

- 걷자! 홀로도 좋지만, 함께라면 더욱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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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환(bluegarden)등록 2022.01.15 16:15
  언제부턴가? 제주올레가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낙원이란 얘기가 들렸다. 한 번 걷자는 욕심이 생겼다.
  마침, '2021 제주올레걷기축제'가 10월 22일부터 추진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제주올레에서 매년 2~3일 단기간에 대규모 인원으로 진행했으나, 코로나19로 내용이 확 바뀌었다. 5일, 10일, 15일, 23일 완주 등 프로그램을 다양화시켜 소수 인원을 코스별로 분산한 23팀을 구성해 걷는다는 내용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완주는 개인 형편 따라 한 달, 때론 1년 이상 걸리기도 하고 건각은 20일이라 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자신의 형편대로 걸으면 되는 셈이다. 표준은 하루 한 개 코스로 26개 코스 425km를 26일간 걷기다. 소위 말하는 일시 완주이지만, 힘이 들어 건강한 청장년이나 가능하다고 했다. 주변에 걷기를 얘기하니 아내를 비롯해 10중 8, 9는 반대를 했다.
  사실 하루 20km 안팎으로 2박 3일 정도 걷기는 경험치로 따져 별로 걱정되진 않는다. 전체 52km의 지리산 화대종주 – 전남 구례 화엄사 입구에서 경남 산청 대원사 아래까지 걷는 수준이다. 체중이 2~3kg 빠질 정도로 힘들기는 하지만 집에 와서 하루 이틀만 푹 쉬고 나면 일상으로 회복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 달 가까운 23일을 연속해 걷기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매일 쌓일 피로를 제때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건강 유지가 염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어보고 싶었다. "한번 부딪혀 보자.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하면 되지." '2021 제주올레걷기축제'의 23일 완주에 참석하기로 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안전을 위해 23개 코스별 참가인원을 20명으로 제한해 희망 출발점을 신청받았다. 공항에서 가까우며 20km 내외의 장거리 코스가 며칠간 계속 이어지는 17코스를 출발점으로 신청하고 나름으로 준비했다.  

제주 올레 26코스도 ⓒ 성종환

  
  10월 21일 제주공항의 올레안내소에서 축제 참가자 신고 후 올레패스포트 등을 받았다. 시간 여유가 있어 공항올레를 거쳐 17코스 해변을 둘러 제주버스터미널 인근의 1박 17,000원에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이하 게하)까지 걸어서 여장을 풀었다. 난생처음으로 이용한 게하였다. 2단 침대가 4개 들어 있는 8인실이라 약간은 부산스러웠으나 견딜만했다.
  10월 22일 축제 첫날, 제주버스터미널 구내식당에서 제주 특식 고기국수를 아침 식사로 챙겼다. 그리곤 291번 지선버스를 40여 분 타고서 (사)제주올레에서 알려준 17코스 출발점인 제주시 애월읍 광령1리 사무소를 찾아갔다.
  사무소 앞 공터에는 배낭을 멘 여러 사람이 있었다. 집합 시간 10분 전이 되자 청색 올레 유니폼을 입은 여성 한 분이 외쳤다. "올레 축제를 참가하신 분은 모여주세요." 그녀가 걷기를 선도할 자원봉사자(이하 자봉)였다.
  코로나19 방역 체계가 엄격해 자봉 주관으로 휴대용 체온계로 발열검사, 안심코드 찍기, 코스 시작 스템프 찍기 등 기본 절차를 끝내고 자기소개 1분 인사를 나눴다. 자봉 2명에 참가자 10명으로 팀이 구성됐으나, 남자는 나를 포함해 2명뿐이었다. 20대부터 60대까지 골고루 분포된 여성이 80%를 차지했다. 여신의 땅 제주도라 하더니, 여성 우위의 올레 걷기란 말이 체감됐다.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자봉의 선창에 따라 "가자 올레, 따로 함께"를 한목소리로 외치고 출발했다. 자봉 한 분이 앞장서고 참가자들이 중간, 다른 자봉 한 분은 맨 뒤에 따라 걸었다. 첫 만남이라서 분위기가 서먹하다 보니 아무래도 자봉 두 사람이 주도해 서로에게 말을 건네며 진행 시켰다. 자봉은 길 안내뿐만 아니라 안전 지킴이 역할을 하면서도 올레에 관련된 환경, 역사, 인문 등 다양한 내용을 꼼꼼하게 들려주었다. 더할 수 없는 올레지기였다.
 

청색 유님폼을 입은 올레 안내 자원봉사자와 함게 걷기(왼쪽 전봇대 리본은 올레 표지) ⓒ 성종환

 
  나는 기록 수단으로 사진 촬영을 많이 하려니 자연스레 후미에 갈 수밖에 없었다. 뒤에 따르던 자봉이 내 걸음에 맞추며 이것저것 물었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데 몇 살이냐? 어디서 왔느냐? 왜 무거운 배낭을 지느냐?" 이런저런 신상 파악을 하며 올레에 얽힌 여러 가지 얘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7학년 5반으로 올레는 처음이다. '산티아고 까미노'에 가기 위한 예행 연습 삼아 완주를 신청했다. '산타이고 까미노'는 매일 숙소를 바꾸며 직진으로 걸으므로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모든 짐을 져서 배낭이 무겁다. 숙소도 여럿이 자는 게하 중심으로 매일 바꿀 계획이다." 진솔히 대답했다.
  오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걸어왔다. 점심 식사 때 자봉을 통해 자연스레 나의 신상 정보가 공유됐던 모양이었다. 40대 한 여성은 "산티아고 가실 계획이시라면서요? 저도 몇 년 전 다녀왔는데, 배낭은 절대 가벼워야 합니다. 무리해서 걷지 마세요. 이왕 가시는 길 완주하셔야죠" 조언했다. 마음 깊이 고마웠다.

  주최한 (사)제주올레 규정에 따라 하루에 한 코스를 목표로 타박타박 즐기며 걸었다. 21코스를 끝낸 이튿날인 수요일은 휴식하는 날로 정해져 있어 단체 걷기가 없었다. 가까운 우도에 은근히 마음이 쏠렸다. 축제 기간 중 휴식하는 3일을 이용해 섬 3개 코스를 걸으면 올레 전체 완주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가자! 6일 차에 혼자서 1-1코스인 우도를 들어가 하루를 걸었다.
 

성산포 쪽에서 내려다 본 우도 끝자락 ⓒ 성종환

 
  가장 우려됐던 초반 1주일을 무사히 보내니 자신감이 붙었다. 밤 10시 이전 잠자리에 들어 곧바로 곯아떨어져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밥맛도 좋았다. 매끼 메뉴를 바꾸면서 반찬까지 거의 싹 비웠다. 그렇게 하루 한 코스씩 계획대로 걸었다. 거리가 멀고 가장 힘들다는 추자도는 오가는 배 시간에 맞춰야 해서 김밥 한줄과 물만 먹으며 총알같이 걸었다. 단, 일정을 잡았으나 풍랑으로 갈 수 없던 가파도는 9.3km로 짧은 14-1코스를 오전에 끝내고 당일치기로 오후에 다녀왔다.
  하루 2개 코스로 가파도 걷기는 오랜 지인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그는 제주 토박이로 올레 완주 경험이 있었다. 제주 도착한 첫날 저녁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눈 후 헤어졌다. 그는 사흘이 멀다고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날씨로 가파도에 가지 못함을 듣고 하루 2코스 걷기를 제안했다. 그리곤 14-1코스 종점까지 승용차를 가져와 모슬포 운진항 여객선터미널까지 이동 후 가파도를 함께 걸으며 안내까지 자청했다. 모슬포로 돌아와선 어항 전문식당에서 제철을 맞은 방어회와 탕을 즐겼다. 내가 식대를 내려다 식당 주인과 협공한 몸싸움에 밀려서 대접받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 가지로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걷는 동안 동행자는 매일 바뀌었다. 다만, 완주를 신청한 60대 두 여인과는 섬 지역 3개 코스를 빼고는 23일 동안 함께 걸었다. 첫날은 서먹했으나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인식하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하루 이틀 지나자 친근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선생님'이라던 호칭이 '오라버니', '쌤' 등으로 달라졌다.
  그중 한 명은 나와 띠동갑으로 누이처럼 매사에 살갑게 대해 주었다. 그녀는 공직 근무 중 원인불명의 뇌위축병으로 아산병원 중환자실에서 1년을 보내고, 명퇴 후 4년간 일반 병동에 있었다고 했다. 2020년 9월, 제주도에 근무하는 아들 권유로 요양차 제주도에 내려와 처음엔 뒤뚱뒤뚱 불안하게 걸었으나 올레를 계속 걸으면서 1년여 만에 건강을 거의 회복해 다섯 번째 완주에 나서 이젠 올레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클린올레까지 실행하는 열성 올레꾼이 됐다고 했다.

  제주도가 낳은 유명 인사로 올레를 개척한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과는 사흘을 함께 걸으며 알찬 대화를 나누었다.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사직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카미노'를 걸으며 더욱 아름다운 제주도를 그렸다고 했다.
  그녀의 비전과 확실한 미션이 오늘의 제주올레를 만들면서 우리나라 걷기 문화를 새롭게 펼치는 바탕이 되었다고 여겼다. 함께 초창기 코스 개발에 노력한 남동생은 하늘 올레를 열기 위해 2020년에 먼저 출발했다는 가슴 먹먹한 얘기도 들려주었다.
 

올레꾼과 함께 한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중앙 노랑 셔츠) ⓒ 성종환

 
  1차 취업 관문에 실패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청년, 아내와 이혼 후 삶의 갈피를 잡기 위해 걷는 장년 등 나름의 인생을 성실히 사는 올레꾼과 오랜 친교를 가진 지인도 여럿 만났다.
  특히 중고교 동기로 3년 전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한 친구는 전동 휠체어를 타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사는 마을 입구인 8코스에 부인과 같이 마중 나와 2km를 함께 이동하며 정담을 나눴다. 저녁에는 숙소까지 찾아와 중문에 있는 백종원 씨가 운영하는 호텔 한식당에서 영양 보충하라며 전복이 가득한 만찬으로 우정을 새겨주었다.

  올레를 걸으며 제주도를 알면 알수록 깊이 빠져들었다. 빼어난 자연 가치를 새삼 강하게 새겼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팔방으로 뻗어내린 산세와 옹기종기 분포된 오름은 겉보기에 불과했다.
  이국 풍광을 만드는 야자수 등 많은 식생이 있고 꿩, 노루가 숨바꼭질하며 사람의 근접을 막는 밀림인 곶자왈이 있다. 백색, 흑색, 청자색으로 변신하는 바다를 낀 현무암의 기기묘묘한 해변과 모래사장, 용천수 등.
 

제주도 특산 식물인 문주란 군락 ⓒ 성종환

 
  그 자연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흔적인 제주도 특유 돌담 - 집담, 밭담, 산담, 원담, 성담, 개경담, 올레담을 끼고 돌며 걸었다. 특히 밭담은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모두 이으면 2만2천km 정도로 추정된단다.
 

밭 가장자리에 현무암으로 쌓은 밭담 ⓒ 성종환

   

현무암으로 조성된 산소 주변의 산담 ⓒ 성종환

 
  밭담 사이 사이에서 무, 당근, 비트, 마늘, 양배추, 브로콜리 등 풍성하게 자라는 많은 작물을 보면서 농업, 농촌, 농민에 대한 감사가 절로 나왔다.
  배움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기회도 됐다.
  천주교 박해로 남편인 황사영이 능지처참 되고 관기로 제주도로 유배됐으나 많은 주민을 교화시킨 정난주 마리아의 성역화된 묘소, 제주도 주둔 몽골군을 몰아내고 백성 사랑의 공덕을 지금껏 기리는 추자도 최영 장군의 사당과 삼별초 최후 항거지 항파두리성, 근대사의 엄청난 비극이 아직도 진행 중인 제주4.3사건의 현장 등 필설로 표현키 어려운 과거가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11월 16일, 16코스를 끝으로 완주를 마치고 9377 숫자가 적힌 증서를 받았다. 제주올레를 9377번째 완주했다는 증표였다. 5년 전 칠순 기념으로 아프리카 초고봉 8,795m 킬리만자로를 등정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의 뜨거움을 느꼈다. 새로운 경험이 주는 보람이란 행복의 자존감이라 여겼다.
  

완주 후 명예의전당 등재 ⓒ 성종환

   
  그렇게 한 달여 제주도를 놀멍 쉬멍 걸으멍 – 놀며 쉬며 걸으며 탐방했다. 한라산을 등정하고 올레 26코스 425km를 25일 동안 13kg 안팎 배낭을 메고 거의 매일 숙소를 바꿨다. 먹고 자고, 감탄하고 즐기며 사진 찍고, 동행자와 대화하는 기본에만 충실했다. 아내 등 카톡 나누기가 유일한 SNS였다.

  올레를 걷는 동안 여러 사람이 관심을 보이며 나이를 물었다. 7학년이라 대답하면 돌아온 말은 "그 연세로 첫 길에 26코스 일시 완주라니, 대단하세요." 아니면 "무모하시네요" 수준이었다. 하긴, 걷는 동안 어디서나 내 또래를 전혀 만날 수 없었으니 이상히 여겨지겠지만, 그들 나름만의 인식임을 확실히 알았다. 올레는 두 다리로 걸을 수만 있다면, 누구나 자신이 걸을 수 있는 거리만큼만 꼬닥꼬닥 즐겁게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금녕 해변에서 가개를 펴고.. 뒤로 보이는 풍력발전단지 ⓒ 성종환

 
  7학년 - 70대 내 나이가 어때서? 올레 걷기 딱 좋다. 휴가를 받아야 할 직장도 없다. 아들딸 키워 4명의 친·외손자녀 모두 보고 칠순을 넘겼겠다. 행여, 걷다 죽어도 아름다운 올레에서 하나님 부르심이니 원통치도 않으리라.
  걷기 사흘째에 발바닥이 벗겨지고, 허벅지가 뻐근했으니 '무모하다' 소리를 공감할 수밖에 없는 25일간의 힘든 여정이었으나, 후유증 없이 일상으로 복귀하고 보니 무탈했음에 오직 감사할 뿐이다.
  매일 100컷 이상 찍은 사진 파일 정리로 가슴에서 새록새록 하는 올레의 감흥을 달래며 탁상 달력을 뒤적인다. 올레를 걸으며 아름다운 제주를 맛보는 상상의 구름을 탄다.
 

제주도 김녕 서포구에서 본 일출 ⓒ 성종환

 
  또 가야지. 언제? 동백꽃 흐드러지게 피고 곶자왈 백서향 향기가 진동하는 2월? 노란 유채꽃 필 4월? 아니다. 아무 때나 좋다. 마음 따라 배낭 메고 나서면 된다. 설문대할망 전설이 녹아있는 제주올레를 즐기며 걷자. 홀로라도 좋다. 함께라면 더욱 좋으리라. 나이 탓하며 안타까움을 남기지 말자. ♥
 
덧붙이는 글 비슷한 내용이자만, 체제를 조금 달리해서 (사)농진중앙회 발행 월간지 '희망농촌' 1월호에 게재됐으며, 제 개인 네이버 블로그 '청원만보'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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