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첫째는 아직 한글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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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zivton)등록 2021.12.28 17:21

길에 떨어진 잎사귀와 지나가는 개미도 마냥 궁금하고 즐거운 여섯살 첫째. ⓒ 박소희


여섯 살 첫째 아이는 아직 한글을 모른다. 또래 중에는 한글을 다 뗀 아이들도 제법 있을 텐데 첫째는 아직 ㄱ,ㄴ,ㄷ 도 모를뿐더러 한글을 배우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책은 꾸준히 보고 있으니 은근슬쩍 공부 아닌 척 놀이로 둔갑시켜 한글 교재도 펼쳐보고 재미있어 보이는 한글 영상도 보여주며 흥미를 끌어보았으나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다섯 살 때까지는 한글은 관심 가지고 접하면서 알아가는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기 때문에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은 말도 글도 다 때가 되면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한데 그 '때'가 조금 더디 오는 것 같아 마음 한편에 살살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야, **는 한글 알고 싶지 않아? 한글을 알면 **가 보고 싶은 책 엄마가 읽어주지 않아도 언제든지 읽을 수 있고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면 재미있는 일도 훨씬 많아지고 알게 되는 것도 많아질 텐데, **는 어때?"

"나는 아직 한글 모르겠어. 어려워."

"그렇구나, 아직 한글이 어려워?"

"응, 나는 아직 어린이니까. 원래 어린이는 어려운 건 못하는 거야."

말은 아주 청산유수가 아닌가. 책 보는 걸 싫어하는 편도 아니고 책 읽어주는 티비에 나오는 좋아하는 책들은 이미 몇십 번을 봐서 제목을 줄줄 꿰며 책을 가지고 제가 한 장씩 넘겨가며 구연하듯 떠들기도 잘한다. 그런데 왜, 왜 한글을 배우는 데는 티끌 같은 관심도 없는 걸까.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수 없이 많은 때를 기다리고 지나는 일을 하게 됐다. 때가 되면 뒤집기를 하고 걸음마를 하고 말이 트이고 사람들과 건강한 상호작용을 하며 병원 벽 포스터에 붙여진 영유아 성장도표에 맞게 키와 몸무게도 자라야 하는 수많은 때를 지나는 거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때에 내 아이가 머물러 주는 것이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고 때론 세상 무엇보다 간절한 일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때가 되면 한다' 의 그때가 우리 아이에게 매번 늦지 않게 찾아와 준다면 그저 감사한 일이지만 늦어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사방으로 찾아다니며 그때가 빨리 와주길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때가 대답해주기 전에는 어떤 질문의 답도 먼저 들을 수 없는 것 같다. 그저 작은 아이의 마음을 복잡한 어른의 속으로 미뤄 짐작만 해볼 뿐이다.

거실 저쪽에서 매트를 뒤집어 장난감을 잔뜩 쌓아놓고 제 집이라며 세상 신나게 놀고 있는 첫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도통 한글에는 관심이 없을까, 여섯 살인데 ㄱ,ㄴ,ㄷ도 모르면 너무 늦는 게 아닐까, 어린이집 다시 가게 되면 한글을 전혀 몰라서 친구들과 있을 때나 수업 중에 혹시 난처한 상황을 마주하진 않을까 생각이 하나씩 꼬리를 문다.  

"엄마, 엄마 이거 봐! 여기가 내 집이야, 멋지지? 여기서 잠도 자고 놀이도 하고 앉아서 쉴 수도 있어!"

"응, 그래 멋지네"

꼬리물기 같은 생각을 하느라 자동응답기가 돌아가듯 건조하게 대답한 걸 느낀 걸까, 첫째가 날 채근하며 다시 말했다.  

"아이 참, 엄마, 내 집 진짜 멋진 건데? 엄마 한번 잘 봐봐!"

옷깃을 당겨오는 손길에 생각이 멈추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니 도대체 이 멋진걸 왜 몰라보냐는 표정의 생기 어린 진지한 얼굴. 아이의 얼굴을 보는데 문득 다른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

아직 한글을 모르는 여섯 살이 아니라 눈썰미가 남다른 영민한 아이로, 호기심이 많아 세상 모든 걸 새로운 눈으로 볼 줄 아는 생기 넘치는 아이로 널 볼 수는 없을까. 노래 부르기도 춤 추기도 좋아하는 유쾌한 아이로 좋음과 싫음이 분명한 명쾌한 아이로 널 볼 수는 없는 걸까. 이 세상에서 누군가 한 명쯤은 그런 눈으로만 널 보아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 사람이 너의 엄마인 나라면 더 좋지 않을까.

막 세상에 태어나 그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겨우 뜬 눈으로 나를 보던 너를 향해 부디 바르게 그저 건강하기만 해 다오, 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자기가 만든 이 멋진 집을 왜 못 알아 보냐며 나를 올려다보는 네 눈에서 5년 전 어느 여름날 우리에게 찾아와 준 너를 안고 눈물을 흘렸던 마음을 기억해냈다.

그래, 세상에서 누군가 한 명쯤은 너를 아직도 한글을 모르는 여섯 살이 아니라 숨겨진 가능성으로 봐주면 좋겠다. 네가 인생의 과업들을 제때 해내고 있나 아닌가만 조급하게 살피기보다 네가 바르게, 건강하게 네 자신과 삶을 대하고 있는지 찬찬히 지켜봐주면 좋겠다. 그게 너의 엄마인 내가 될 수 있다면 참 감사하겠다.

평생 그런 눈으로 널 보아줄 수 있기를. 부디 바르게 그저 건강하기만 해 다오. 그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한 사람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 먼저 게재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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